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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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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지리산서 산야초차·효소 연구 전문희씨

산야초와 함께한 16년… 바람과 구름을 닮아있더라

  • 기사입력 : 2011-08-23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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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지리산 자락에서 산야초차와 효소를 연구하고 있는 전문희씨가 산야초를 채집하고 있다.
    전문희씨가 자신이 만든 백초차를 따르고 있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자락에 요즘 취재진이 몰려 야단법석이다. 전문희씨를 만나기 위해 전국 언론사 기자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전문희씨를 도시로 불러 취재하면 될 것인데, 서울에서, 부산에서, 창원에서 왜 멀리 있는 지리산 중턱까지 물어물어 찾아가 취재해야만 하는 것일까?

    지리산에서 16년간 살면서 ‘산야초차·효소 연구가’로 잘 알려진 전문희(50)씨는 지난 2003년과 2007년 ‘지리산에서 보낸 산야초 차 이야기’를 두 권 펴낸 데 이어, 최근 또다시 책을 발간했는데, 전국의 기자들이 지리산으로 몰려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씨는 지난 5월25일 집에서 간편하게 효소를 만들어 먹는 방법을 제시한 ‘지리산에서 보낸 산야초 효소이야기(도서출판 이른아침)’를 펴냈다. 이 책은 발간 한 달 보름 만에 ‘건강에세이부문’ 베스트셀러에 올라 화제가 되고 있다.

    전씨가 16년간 지리산에 터잡아 연구하고 체득한 효소이야기를 책으로 발간하자 건강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이 “도대체 효소가 뭔가”라는 질문을 각 언론사에 했고, 기자들이 전씨를 찾아가기 위해 몰리면서 산골마을이 분주해진 것이다. 전씨의 정보파악을 위해 산청군 홈페이지를 뒤져봐도 없고, 지리산 중산리를 찾아다니며 물어물어 가야만 그녀를 만날 수 있어 기자들이 애를 먹기도 했다. 다행히 전씨가 운영하는 네이버 카페(전문희의 산야초 차 이야기)를 통해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건강한 삶에 목마른 도시민들의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그녀의 차 이야기와 효소 이야기를 담기 위해 7월 말과 8월 초 두 차례 지리산을 찾아갔다.




    통기타 가수 시절 ‘제2의 패티김’이라대요

    차와 효소 이야기를 나누기 전 그녀의 과거 전력을 끄집어내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통기타 가수 시절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더니 그녀가 느닷없이 차실에 걸어놓은 통기타를 들고 나와 은희의 ‘꽃반지 끼고’라는 노래를 즉석에서 불러준다. 지금이라도 기타를 메고 스튜디오로 나가면 멋들어진 음반 몇 개쯤은 충분히 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음색이 곱고, 성량과 감성이 풍부했다.

    지난 1987년께 그녀는 서울에서 통기타 가수로 활동하면서 옴니버스 음반을 낸 후 인기가 폭발해 방송에 자주 출연하면서 글도 쓰고, 노래도 부르고, 패션모델도 하는 등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난 팔방미인 스타였다.

    하지만 연예계가 싫어 제2의 장영자가 되겠다는 새로운 포부가 생겨 ‘제2의 패티김’이라는 기대를 등지고, 사업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원목가구 제조업과 패션사업이다. 돈이 전부인 줄 알고 시작해 돈만 모으고 있었는데 그녀를 도시에서 내쫓고 산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인생의 전환기가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 임파선 세포 상피암이라는 어머니의 병환 소식에 그 잘나가던 ‘신인스타 전문희’도 “이 세상에 어떤 것도 무상하지 않은 것이 없구나”하는 원초적 고민이 생겨 서울에서의 모든 삶을 정리하고 6개월 후에는 못 보게 될 어머니에게로 달려갔다.

    암에 좋은 약초를 공부하고, 그 약초를 찾아 달여드리는 등 민간요법으로 3년6개월을 어머니와 더 살 수 있었다. 어머니와 동숙한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는 암에 좋은 약초, 체질을 개선하는 약초에 대해 통달하게 됐고, 그때부터 약초 발효를 시작하면서 ‘인간이 면역을 위해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효소 발효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어머니 여읜 후 산야초·효소에 더 깊이 빠져버렸죠

    어머니의 병환 소식과 3년6개월의 병구완 기간은 그녀의 삶을 도시인에서 자연인으로 돌려놨다. 어머니를 여의니 30대 중반. 늦었지만 새 가정을 꾸릴 수도 있었지만 세속의 무상을 체험한 그녀이기에 한참동안 결혼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어머니의 산, 지리산이다. 어머니를 잃은 서러움이 달래질까 해서 지리산 품에 안겼는데, 처음에는 마땅한 거처를 찾지 못해 고생했다. 남원 하동 피아골 구례 등지를 떠돌다가 지리산을 한 바퀴 빙 돌아 지난 2004년부터 지금의 시천면 중산리 자락에 터를 잡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씨는 고집이 세다. 어머니 병구완할 때처럼 누군가를 살린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차와 효소를 만들고 있다.

    전씨는 야생 백초차를 만들 때 지리산 700고지 이상을 직접 돌아다니며 봄에 채집한 100가지 약초 등 산야초의 새순만을 고집해 덖음차를 만들어내고 있다. 칡 넝쿨 구덩이에 빠지고,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도 산야초 채집은 자신이 직접 해야 한다는 철학과 고집이 있다. 봄 100일이라는 한정된 시간 내에 채집해야 한다는 어려움도 크다. 시장에 팔 수 있는 차의 양도 많지가 않다. 그래서 전씨의 백초차에서는 희귀한 맛, 신비스러운 맛이 우러나오고, 그녀의 삶을 반영하듯 희로애락 부귀빈천도 녹아 있어 그 맛과 향이 탁월하다.

    지리산에서 사계절 야생하는 산야초를 채집해 효소도 만들고 있다. 100여 가지의 초(草) 근(根) 목(木) 피(皮) 실(實) 화(花)를 계절별로 채집한 후 산야초 재료들에 설탕을 넣어 발효시킨다. 그렇게 모아진 효소들은 16년 동안 항아리에 숙성시켜온 효소들이다. 발효란 설탕과 재료가 분해되는 과정. 설탕의 양이 중요하고 식물의 특성에 맞춰 설탕의 양을 조절하는 체험적 경험이 중요하다.

    전씨는 “인간은 효소 없이 한순간도 살 수 없다. 효소가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잡아주는데, 우리 몸 스스로 생산하는 효소는 각종 인스턴트 식품과 술·담배, 환경공해 등의 독소를 빼내는 데도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라며 “효소를 보조적으로 첨가해서 먹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몸에 좋다고 뭐든 싹쓸이하면 후손은 뭘 먹죠

    전씨는 국민건강 보건 차원에서 수입차와 인스턴트 식품, 캔음료를 덜 마시게 하고, 우리 약초차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그 선구자적 역할에 대한 확고한 사명감도 갖고 있다. 그래서 누구나 먹어서 약이 되도록 철저하게 청정지역이 아니면 산야초를 채집하지 않는다.

    하지만 산야초를 16년 동안 채집한 전씨가 지금은 그 산야초를 보호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약초꾼이 약초를 보호해야 한다고? 이유인즉, 산야초차 등 우리차 마시기 운동이 확산되면서 무엇이 몸에 좋다는 소문이 나면 싹쓸이꾼들에 의해 귀한 약초들이 사라져 가기 때문이다. 자연이 주는 건강 재산을 잘 보전하면서 채취해야 하는데, 나무 밑둥치까지 베어 가면서 각종 약초축제에 2만원, 3만원에 내다파는 현실을 경계하는 것이다.

    전씨는 “후손들에까지 물려줘야 할 희귀약초의 생명을 보전해 가면서 채취하는 등 자연이 주는 가치를 후손들과 공유해야 한다”고 산야초 ‘싹쓸이꾼 대안’을 호소했다.

    항아리를 열어 16년 동안 발효중인 효소를 확인하고 있다.



    산생활 16년, 이제 나를 찾고 싶어요

    전씨는 지난 16년 동안 지리산으로 많은 사람을 불러들였다. 자신을 만나려는 지인부터 백초차와 효소를 구하려는 사람들, 그녀를 데려가려는 자치단체들의 행렬에다 자신을 취재하려는 많은 언론인들까지. 하지만 전씨는 찾아오는 손님들에 시달리고, 백초차와 효소 만들기에 씨름해야 하고, 강의도 해야 하고, 원고도 쓰고, 상담도 해야 하는 1인 다역의 배역에 많이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전씨는 “현재 혼자서는 너무 벅차다. 역할 분담을 해야 한다. 지리산 건강학교를 만들어 바른 먹거리, 바른생활에 대해 성찰하고, 산이 주는 만큼을 얻어갈 수 있는 절제의 마음과 산이 주는 먹거리에 대한 감사함을 강의하고 싶다. 물론 지리산 주민들과 외부에서 들어오는 약초꾼에 대한 교육도 싹쓸이 예방을 위해 중요하다. 지리산 일대 모든 자치단체에서 교육적 대안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리산을 구석구석 누비지만 가녀린 소녀의 심성을 가진 전문희씨.

    그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현실과 타협해야 할 시점도 있었지만 절대 차와 효소 만들기에는 타협하지 않고 차별화해 왔다. 대량생산의 달콤한 유혹을 개척자 정신과 그녀 특유의 고집으로 배척해 왔다. 산속으로 더 들어가 초막 하나 짓고 구름 보고 산 냄새 맡으면서 참선하고, 바람 보며 ‘멍하니’ 살고 싶다는 게 향후 전씨의 꿈이다. 글도 쓰지 않고, 사람도 만나지 않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다 가라’는 그 ‘청산’처럼 정말 조용히 살고 싶단다. 잘나가던 가수 시절 어머니 병구완을 하면서 삶의 무상함을 알게 돼 사람들의 건강을 챙겨주는 평생의 업보를 빨리 마무리하고 자신을 찾고 싶다는 뜻일 게다.

    전씨는 “물질도, 사랑도, 명예도 다 떠나가더라. 벌여 놓은 일이 마무리되면 바람처럼 구름처럼 훨훨 날아 자유인이 돼 떠날 것”이라며 말문을 닫아버렸다.

    반나절 동안 취재하는 기자도, 취재 대상인 전씨도 모두 쾡한 토끼눈이 돼 버렸지만 푸른 지리산은 여전히 말이 없고, “악을악을”거리던 매미는 어찌 그리 울어대던지.

    “백초차나 한 잔 더 주세요”라고 말을 건넸지만 “발효 중인 효소 항아리를 돌보러 가야 한다”며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전씨의 뒷모습에서 고집쟁이 맹렬여성이라는 독특한 효소 냄새가 진하게 전해 왔다.

    “백초차 대신 기자님 건강을 위해 지리산 푸른 기운이나 한 사발 드시고 가세요”라는 말이 그녀의 마지막 당부였다.


    글= 조윤제기자 cho@knnews.co.kr

    사진= 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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