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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30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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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군하리- 김사인

  • 기사입력 : 2011-12-01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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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다 버린 집들 사이로

    잿빛 도로가 나 있다

    쓰다 버린 빗자루같이

    나무들은 노변에 꽂혀 있다

    쓰다 버린 담벼락 밑에는

    순창고추장 벌건 통과 검정 비닐과

    스티로폼 쪼가리가

    흙에 반쯤 덮여 있다

    담벼락 끝에서 쓰다 버린 쪽문을 밀고

    개털잠바 노인이 웅크리고 나타난다

    느린 걸음으로 어디론가 간다

    쓰다 버린 개가 한 마리 우줄우줄 따라간다

    이발소 자리 옆 정육점 문이 잠시 열리고

    누군가 물을 홱 길에 뿌리고 다시 닫는다



    먼지 보얀 슈퍼 천막 문이 들썩 하더니

    훈련복 차림의 앳된 군인 하나가

    발갛게 웃으며

    신라면 다섯개들이를 안고 네 거리를 가로지른다


    ☞ 김사인 시인은 진중한 사람입니다. 느려터진 말씨에다 세상을 보는 눈이 하도나 무서워 후배들은 물론이고 선배 시인들마저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다 그의 앞에서는 모두 다 매무새를 매만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시를 보십시오. ‘잿빛 도로’ ‘쓰다버린 빗자루 같은 나무’ ‘쓰다버린 순창고추장 통’ ‘개털잠바 노인’ ‘신라면 다섯 개들이’ 같은 구체적 표현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풍경은 전혀 억압도 무서움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발소 자리 옆 정육점 문이 잠시 열리고/누군가 물을 홱’ 뿌리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꽤 썩 상쾌한 어떤 느낌을 전해 받습니다.

    ‘훈련복 차림의 앳된 군인 하나가/ 발갛게 웃으며/신라면 다섯 개들이를 안고 네거리를 가로지른’다니요. 무릇 아무런 억압도 없는 시, 고도로 계산된 것이지만, 일부러 허름한 시. 그게 김사인의 시이고 김사인 시의 어떤 느낌이지요. 어떠세요. 저는 이 느낌이 참 좋습니다만. -유홍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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