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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30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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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천종호 창원지법 소년부 판사

“부모와 사회가 가정을 지키면
아이들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 기사입력 : 2012-01-31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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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원지법 소년법정에 앉아 있는 천종호 판사.

    천종호 판사가 법정에 들어가기 전 법복을 가다듬고 있다.



    새해 들어 학교폭력 근절이 전국민적 관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7년째 가사소년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창원지법 소년부 천종호(47) 판사를 지난 26일 만나 소년재판과 청소년회복센터, 법관으로서의 삶 등에 대해 들었다.



    가정은 천금만금보다 중요

    비행소년을 먼저 화제로 올렸다.

    “청소년 비행의 가장 큰 원인은 가정과 가족의 불화와 해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족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냉대를 당하지만, 돌파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그들을 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제대로 된 환경과 교육을 제공하지 못하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는 우리 사회를 볼 때도 안타깝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천 판사는 “가사소년사건을 처리한 경험으로 터득한 한 가지 진리는 가정은 천금만금보다 소중하다는 것이다”며 “비행청소년의 부모와 사회에 가정을 지켜달라고 부탁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화제를 청소년회복센터로 돌렸다.

    “소년보호처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재비행의 예방인데 2011년 1년간 통계를 내어 보니 결손가정 소년의 재비행률이 56.78%나 됐습니다. 결손가정의 소년들을 그대로 사회로 돌려보내는 것은 재비행을 방치 내지 조장하는 것밖에 되지 않고, 그렇다고 결손가정의 비행소년들 모두를 소년원에 보낼 수는 없어 생각해 낸 것이 ‘대안가정’ 내지 ‘사법형그룹홈’입니다.”

    그는 청소년회복센터는 가정이나 가족이 없는 소년들에게 ‘가정과 같은 공동체’를 만든 것이다며 센터 운영자들은 소년들의 부모를 대신하고, 자원봉사자들은 소년들의 가족을 대신하며, 보호소년들은 서로 형제가 되게 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모범생, 중학교 때부터 법대 목표

    학창시절 모범생이었던 그는 중학교 진학 때부터 법대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가정형편상(3남4녀의 장남)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갈 수가 없어 부산대 법대에 진학한 이후 한눈팔지 않은 덕분에 학점이 매우 좋았다. 사법시험은 대학 졸업 후 2년 만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을 쓸어내린다. 연수원 첫해인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55분께 연수원 정문과 마주보고 있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발생했는데 이날 오후 6시에 아내와 백화점에서 저녁식사를 할 예정이었던 것. 다행히도 사고 전날 연수원 전반기 시험을 마치고 조원들과 식사를 하던 중, 후배들이 아내를 보고 싶다고 해서 부득이 아내를 불러내면서 약속이 취소돼 화를 면했다.

    사고 당일에도 2명의 연수원생과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삼풍백화점으로 들어가다 그중 한 선배가 갑자기 순두부찌개를 먹고 싶다고 해서 백화점에서 나와 건너편에 있는 분식집으로 갔는데 식사 중에 “꽝”하는 굉음이 나기에 밖으로 나와 보니 백화점은 사라지고 연기만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 지금도 그 선배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초임판사 때 부양료청구소송 기억

    기억에 남는 재판은 초임판사 때인 1997년도에 판결한 사건으로 신장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가 혈액투석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두 아들을 상대로 한 부양료청구소송.

    사건은 이렇다. 전직 경찰관인 원고는 결혼 초기에 아내와 아들들을 거의 돌보지 않았다. 오히려 외도를 일삼으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 세월이 지나 생활력을 상실하고 아내도 사망하고 나니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다. 게다가 병까지 얻게 됐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 두 아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두 아들은 그동안 가족들을 위해 아버지가 해 준 것이 무엇이냐며 항변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고, 효는 효. 결국 청구금액보다 약간 낮게 아버지의 청구를 인용했다.

    “당시에는 상당히 희귀한 판결이었습니다. 하지만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이고, 노령화율이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 시대상황을 감안해 볼 때 이와 같은 소송은 계속 늘 것으로 봅니다.”



    법관은 무거운 짐, 무색무취해야

    법관 16년차 그에게 법관은 한없이 무거운 짐이다. 공적 신분의 무거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적 신분으로서도 마음껏 성질을 부리고 싶을 때에도 법원에 누가 될까 봐 참아야 했고, 피해를 당해도 신분을 속이고 그냥 넘어가야 했다.

    주변에서는 그를 ‘가사소년전문법관’이라고 일컫지만 천 판사는 과분하다고 말한다.

    “창원지법에 오기 전까지 합쳐서 5년가량 가사사건을 담당한 적은 있으나, 가사소년전문법관이 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창원지법 소년부를 맡게 된 이후 사회의 구조적인 면, 특히 가정의 해체로 인한 소년비행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 소년재판을 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소년부를 이끌어 갔습니다. 비행소년들의 열악한 현실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보니 그런 명칭이 붙여졌습니다.”

    그는 “법관은 무색무취(無色無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관의 색이 드러나게 되면 재판에 임하는 국민들로서는 법관과 소통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담당 법관의 색에 맞추느라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며 최근 튀는 일부 법관에 대한 견해를 대신했다.

    오는 2월 부장판사로 승진하는 그에게 소감을 물었다.

    “임관 이후 열한 분의 부장판사를 재판장으로 모시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듣고 또 듣는 법관, 단 한 가지의 배움이라도 줄 수 있는 법관이 되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소년전문법관의 길로 가고 있는 그에게 지역 청소년을 위한 등불로 남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천종호 판사는

    1965년 부산 출생으로 부산남고, 부산대 법대를 졸업한 뒤 1994년 제36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1997년 사법연수원을 수료(제26기)하고 같은 해 부산지법 판사로 임관됐으며, 부산지법 가정지원, 부산고법을 거쳐 2010년 2월부터 창원지법서 소년부를 맡고 있다. 교사인 부인과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가정에서는 TV를 보며 아이들의 공부를 방해하고, 아이들에게 관용적으로 대한다는 이유로 아내의 잔소리를 듣는다. 시간 나면 성가를 부르고 독서를 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교회에 나갔다. 대학시절부터 차(茶)를 즐긴다.

    창원지법 소년부에서 1년2개월간 청소년회복센터 아이들과 함께한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책으로 발간할 계획이다. 지난해 10월부터 경남신문에 매주 목요일 ‘소년재판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글= 김진호기자 kimjh@knnews.co.kr

    사진= 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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