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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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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문화기획] 모던걸의 아이콘, 전설의 무용가 최승희

몸짓으로 세계를 유혹한 20세기 최초의 한류스타

  • 기사입력 : 2012-02-13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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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해 1월 창원대학교 의류학과에서는 흥미로운 주제의 박사학위 논문이 발표됐다. 바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월북 무용가 최승희의 복식을 연구한 ‘한국의 신여성 최승희 패션 스타일 연구’라는 논문이었다. 그녀의 뛰어난 춤세계뿐 아니라 복식까지도 연구 대상이 된 것이다. 시대를 풍미한 아이콘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다방면으로 이름을 날린 무용가 최승희, 그녀에 대해 알아본다.

    ▲춤과 처음 만나다

    최승희는 1911년 강원도 홍천에서 최준현과 박용경 사이의 사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15살이었던 1926년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 무용발표회를 구경한 것을 계기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7년부터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노력한 끝에 3년 만에 주연급 무용가로 올라선다. 안락한 삶이 보장된 일본 생활을 버리고 1929년 서울에 돌아와 자신의 이름을 딴 무용연구소를 차렸다. 1930년부터 4회의 신작발표회를 가졌으며, 이듬해 사회주의 문학운동가 안막과 결혼했다.

    ▲춤세계가 변화하다

    초기 최승희 춤의 주류는 현대무용 계열의 작품이었다. 그녀의 그런 시도는 ‘춤은 기생이나 무당들만 추는 것’이라는 당시의 보편적 인식을 조금씩 변화시켰다. 1933년 이시이 문하로 재입문한 그녀는 ‘에헤야 노아라’라는 작품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둔다. 이 작품은 승무·칼춤·부채춤·가면춤 등 고전무용을 현대화하는 데 주력한 작품으로, 일본에서 돌아온 후 한성준에게 고전무용을 배워 전통무를 재인식하게 된 것도 그녀의 춤세계를 변화시킨 요인이었다.

    ▲동양의 무희가 되다

    1936년부터는 최승희 일생의 최고 전성기가 시작된다. 이해 영화 ‘반도(半島)의 무희’에 출연해 4년 장기상영이라는 흥행기록을 세우며 주목받았으며, 이듬해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6개월간 전미 순회공연을 갖는다. 이후 프랑스 23회, 벨기에 9회, 네덜란드 11회, 독일 2회, 중남미 61회의 기록적인 공연을 펼쳤다. 1938년 브뤼셀에서 개최된 세계무용경연대회에 라반, 비그만 등 세계적 무용수들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1939년 파리 국립극장 공연 때는 피카소, 마티즈, 로망 롤랑 등 세기의 예술가들이 동양에서 온 반도의 무희를 보러 왔다. 이로써 그녀는 중국의 매란방, 인도의 우다이 상카르와 더불어 아시아 출신의 세계적 무용가 반열에 오른다.

    ▲유행의 중심에 서다

    최승희는 20세기 최초의 한류스타였다. 해외에 널리 알려진 그녀의 ‘보살춤’은 지금 보아도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몇 가지 장식물을 걸친 반라의 모습으로 추는 관능적인 춤이다. 특히 동양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170㎝의 늘씬한 몸매와 정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연기력으로 외국인들의 극찬을 받았다. 보살춤은 각지에서 공연될 때마다 10여 종의 버전으로 재창조되어 공연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녀는 경성을 주름잡던 모던걸의 대표적 아이콘이기도 했다. 특유의 짧은 단발머리에 클러치백, 빅 벨트, 높은 하이힐, 다양한 모자의 활용 등 패션감각이 탁월했다. 그녀의 감각은 국내에만 머무르지 않아서, 파리에서 가진 ‘초립동’ 공연에 쓰고 나온 초립동 모자가 일주일 만에 파리 여성들 사이에 일대 유행으로 번지기도 했다.

    ▲친일논란에 휩싸이다

    1940년 일본으로 돌아온 최승희는 일본의 간섭을 피해 ‘황군 위문’이라는 명분으로 연구소를 북경으로 옮겨 무용창작에 열중한다. 이런 활동들이 빌미가 되어 광복 후 친일 무용가라는 비판을 받았고, 고뇌하던 그녀는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한다. 평양에 정착한 최승희는 1946년 무용연구소를 설립해 조선춤 체계화와 무용극 창작에 힘썼다. 이후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하며 인민배우라는 최고의 위치에 오르지만 1950년대 후반 남편 안막의 몰락과 함께 북한 무용계 중심에서 밀려난 뒤 1969년 숙청됐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초라한 인민숙소에서 은둔생활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자세한 사항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탄생 100주년을 맞다

    지난 2011년은 최승희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최승희는 월북무용가라는 이유로 40년 넘게 논의조차 되지 못하다 1988년 월북예술가들에 대한 해금조치가 단행된 이후 북한무용 초기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한 점, 경극을 독자적 무용으로 정립해 중국무용 발전에 기여한 점 등이 높이 평가되면서 2000년대 들어 그녀의 춤세계를 다룬 단행본과 석박사·학술지 논문이 본격적으로 발행되기 시작했다. 2009년에는 다시 한 번 친일논란에 휩싸였다가, 친일인명사전 최종 명단에서 빠지기도 했다. 2006년부터는 강원도 홍천군이 주관하는 ‘최승희 춤 축제’와 함께 포럼과 심포지엄이 해마다 열려 그녀를 재평가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참고자료= 창원대학교 의류학과 박애란 박사학위 논문 ‘한국의 신여성 최승희 패션 스타일 연구’, 김채원 저 ‘최승희의 춤’


    김유경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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