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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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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목욕 단상- 최영인(아동문학가)

  • 기사입력 : 2012-04-06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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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랜만에 봄바람을 만나러 과수원에 들렀다. 봄이 온 줄 모르는지 감나무 가지는 아직 겨울이다. 겨우내 얼마나 움츠렸기에 나무껍질이 지저분하기 그지없다. 나무가 꼭 죽은 것 같다고 했더니 남편은 감나무도 목욕을 해야 된다고 호미로 껍질을 벗기란다. 생각보다 감나무껍질은 쉽게 떨어졌다.

    한 그루, 두 그루 껍질을 벗기다 보니 내가 목욕을 한 듯 개운했다. 껍질 속에는 깍지벌레가 하얗게 서식하고 있었고, 심한 곳은 검게 썩어가고 있었다. 이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사는 동안 감나무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허옇게 살색을 드러낸 감나무는 금방 잎눈이 터질 것만 같았다. 깍지벌레 등쌀에 괴로워했을 나무를 생각하며 팔이 아픈 줄도 모르고 며칠 동안 감나무껍질을 벗기고 나니 등이 결려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목욕이 일상이 돼버린 난 뜨거운 욕탕에서 근육을 풀며 잠시 휴식에 든다.

    유럽의 어느 여왕은 태어날 때와 결혼할 때 딱 두 번 목욕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치와 화려함의 대명사인 루이 14세도 1년에 딱 한 번 목욕을 했다는 기록을 보면 예전엔 목욕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청결의 의미보다 종교적 또는 정신적 의식으로 행해졌기 때문이리라. 요즘은 매일 목욕탕을 찾아 목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목욕도 습관인지라 하루만 목욕을 건너뛰어도 온몸이 찌뿌듯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주일에 한 번 또는 한 달에 한 번꼴로 목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목욕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일본인은 아침에 샤워를 하는 서양문화와는 달리 저녁에 목욕을 한다. 그들에게 목욕은 하루의 피로를 풀 뿐만 아니라 새로이 정신을 가다듬는 정신 위생의 수단이기도 하다. 이는 습한 기후나 다다미문화에서 나온 삶의 한 방편일 수도 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나면 더욱 편안한 휴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대중목욕탕은 일제시대 때부터 생겼다고 한다.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집안에 욕조가 생겨나고, 서울올림픽을 치르고 난 뒤엔 한국의 때밀이가 온 세계로 알려졌다고 한다. 요즘은 외국인들도 목욕탕에서 때밀이 수건으로 몸을 빡빡 미는 걸 자주 본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러 간다’는 입욕(入浴) 수준의 일본과는 달리 우리의 목욕문화는 ‘더러운 몸을 씻으러 간다’는 목욕(沐浴)의 인식이 강하다. 피부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각질이 생기고 떨어져 나가지만 한두 번 때를 밀어 본 사람은 중독처럼 때를 밀어야만 매끈하고 시원해지는 것 같다.

    일주일에 한 번 외식은 안 해도 목욕은 최소한 두어 번 해야 하는, 우리 생활 깊숙이 뿌리내린 목욕문화, 하지만 대중탕에서 지켜야 할 수칙은 얼마나 잘 되고 있는가. 생명과도 같은 물의 중요성은 또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가.

    손 한 번 까딱하면 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샤워기를 틀어놓고 잡다한 일을 다 하도록 잠글 줄을 모르는 사람, 욕탕 물은 자기 체온에 맞춰야 되는 듯 습관처럼 물을 넘기는 사람, 남이야 뭐라 하건 말건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마사지를 하고, 옆에서 충고라도 하면 되레 ‘불쾌하면 집에서 하지 뭐하러 대중탕에 왔냐’고 한 수 더 뜨는 사람도 있다. 아이들이 장난을 치며 정신없이 뛰어다녀도 야단치지 않는 젊은 엄마들, 빨랫감을 들고 와 사람들의 눈총 속에도 아랑곳 않고 열심히 빨래를 하는 할머니, 80대 노인이 보호자도 없이 혼자 목욕을 하다 기운을 잃고 쓰러져 119를 부르는 일도 종종 있다.

    대중목욕탕은 말 그대로 개인의 목욕탕이 아니다. 불편하지만 조금 이해하기도 하고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일은 스스로 삼가야 한다. 요즘은 목욕탕이 때만 밀러 가는 곳이 아니다. 뭉친 근육을 이완시키기 위해 찾기도 하고, 피로에 지친 몸에 여독을 풀며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하는 곳이다. 내가 사용한 뒷자리가 다음 사람이 쓰기에 불편함은 없는지, 작은 마음 씀씀이 하나가 아름다운 목욕문화를 만들어 간다.

    감나무껍질을 박박 벗기며 개운해진 마음처럼 오늘은 따끈한 열탕에서 내 마음에 묵은 때도 함께 말끔하게 씻어내려야겠다.

    최영인(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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