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5월 19일 (일)
전체메뉴

(432) 부지출처(不知出處)- 나온 곳을 모른다

  • 기사입력 : 2012-05-22 01:00:00
  •   


  •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말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하루에 몇 차례씩 나오던 계몽사(啓蒙社)라는 출판사의 도서 광고문구다.

    그 이후로 이 문구는 안중근 의사가 한 말로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 글은 한문(漢文) 배우는 사람이 서당에 들어가면 맨 처음 접하는 추구(抽句 : 지금은 推句로 잘못 쓰고 있다)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경주(慶州) 최부자집 가훈(家訓)이라고 소개되고 있는 구절에 이런 것이 있다. “스스로 처신할 때는 초연하게 하라. 사람을 대할 때는 인간미 있게 하라.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일이 있을 때는 과감하게 하라. 뜻대로 되었을 때는 마음을 맑게 하라.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는 태연하게 하라[自處超然, 對人然, 無事澄然, 有事敢然, 得意淡然, 失意泰然]”.
    교수나 문필가들이 많이 인용하기도 하고, 인터넷 등에는 ‘경주 최부자집 가훈’이라고 올라 있고, 좋은 말이라고 자신의 홈페이지에 옮겨 놓은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이 글은 최부자집 가훈이 아니고, 명(明)나라 중기 최선(崔銑)이라는 분의 ‘육연훈(六然訓)’이라는 글이다. 최부자집 조상 가운데서 어떤 분이 마음에 들어서 베껴 놓았는데, 최부자집 후손들이 자기 조상들이 지은 글로 착각했고, 이후 사람들이 최부자집 가훈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일이 있을 때는 과감하게 하라[有事敢然]”은 잘못 베꼈는데, 원본에는 ‘감(敢)’자가 아니고, ‘참(斬)’자로 되어 있다. ‘단호하게’라는 뜻이다.

    “눈을 밟고 들판을 가면서, 어지러이 가지 말지어다. 오늘 나의 행적이,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되나니.[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迹, 遂作後人程.]”

    이 시는 독립운동가 김구(金九) 선생의 시로 알려져 있고, 한문을 전공하는 어떤 교수도 김구 선생의 시라고 자기 책에서 소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는 조선(朝鮮) 후기 임연(臨淵) 이양연(李亮淵 : 1771~1853)의 시다. 그의 문집 임연재집(臨淵齋集)에 실려 있고, 또 장지연(張志淵) 등이 편찬한 대동시선(大東詩選)에도 이양연의 시로 실려 있다. 원본에는 ‘답(踏 : 밟다)’자가 ‘천(穿 : 뚫다)’으로, ‘일(日)’자는 ‘조(朝)’자로 되어 있다. 김구 선생이 잘못 외우고 있었던 것 같다.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지었다고 소개되는 곳도 있지만, 서산대사의 문집인 청허당집(淸虛堂集)에 실려 있지 않으니, 신빙성이 없다.

    1930년대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의 저술을 다 모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간행했고, 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의 시문을 모아 완당전집(阮堂全集)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러나 이들 책 속에는 청(淸)나라 학자들의 글이 적지 않게 들어 있었다.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교수로 와 있던 등총린(藤塚鄰)이란 사람이 완당전집을 구해 보고는 그런 사실을 지적했다. 다산이나 추사가 참고하려고 베껴 놓은 글들을, 당시 편집에 참여했던 우리나라의 한학대가(漢學大家)인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같은 분들이, 본인의 글인 줄 알고 다 집어넣어 편집했던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었지만, 이런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하나의 시문이 여러 군데 문집에 실린 경우도 있고, 약간 변형돼 실린 것도 있다. 그러니 전문가라도 실수하기 마련이다. 옛날 중국의 이름 없는 사람의 시를 가져와 자기 시처럼 써 먹으면, 바닷속에서 바늘 건져 내는 것 못지않게 밝혀 내기가 어렵다. 남의 작품을 써서 서예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반드시 출처(出處)를 밝혀야 한다. 알기도 어렵거니와, 후세의 혼란도 막을 수 있다.

    * 不 : 아니 불(부). * 知 : 알 지.

    * 出 : 날 출. * 處 : 곳 처.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


    ※여론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