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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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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사라진 남문산역- 박영기(시인)

  • 기사입력 : 2012-11-02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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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 조용하다. 안 들린다. 창밖을 보고 또 보고, 뭔 일이지? 종일토록 기차가 안 지나간다.

    기차소리를 들으며 잠이 든다. 기차소리에 잠을 깬다. 기차바퀴 구르는 진동에 벽이 흔들린다. 구들장이 흔들려 봉숙이 아버지가 새벽잠을 깨신다. 봉숙이 아버지가 봉숙이 어머니를 흔들어 깨우신다. 봉숙이 가족은 기찻길 옆 슬레이트 지붕 아래 산다. 봉숙이네 집 옆에는 장미여인숙이 있다. 딱! 30분만 술만 깨고 가자. 술 취한 장미여인숙이 흔들리다가 어, 왜 안 흔들리지?

    기차가 안 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봉숙이 엄마가 전화를 한다. “얘야 어제부터 기차가 안 다닌다. 낳지 못한 네 여동생은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문산읍으로 이사를 가면 기차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라는 염려는 쓸데 없었다. 창밖 저 멀리 개양에서 읍내 쪽으로 달려오는 기차. 점 점 점 가까이 다가오는 기차. 확 가슴에 안기는 당신 같은 기차. 쌔~앵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당신 같은 기차.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나에게 뜻하지 않은 즐거움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차. 나의 감각을 흔들어 깨우는 기차. 시를 쓰게 하고 시를 쓰지 못하게 하는 기차.

    마산행 통근기차가 오전 7시 20분에 들어온다. 한 남자가 매일 아침 달린다.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기엔 시간이 촉박하다. 논둑을 질러서 달린다. 이미 기차는 남문산역에 들어와 서 있다. 철둑 언덕을 오른다. 발이 삐끗, 미끄러진다. 울타리 사이로 빠져나간다. 기차가 움직이려고 한다. 가까스로 탄다. 자리를 잡고 앉기 전에 기차가 출발한다. 매일 아침 이 시간에 창밖을 내다본다. 저 남자가 오늘도 기차를 무사히 탈까? 한 번쯤 못 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5분만 일찍 나오지 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남자를 태우고 기차가 막 지나간 철로는 따뜻할까? 따뜻한 정도가 아니라 뜨겁겠지? 나는 궁금하다. 매 시간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뜨겁겠지? 뜨겁겠지?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이 뛰는 저 남자의 뜨거운 가슴처럼! 생각만 해도 심장이 뛴다. 오감이 함께 뛴다. 미래, 현재, 과거 시간의 경계가 뒤죽박죽 엉킨 칡넝쿨이다. 기억의 저 아래층 서랍을 연다. 교복을 입은 소녀 대여섯 명이 기찻길에 앉아서 사진을 찍는다. 내 팔에 네 팔을 걸고 네 팔에 내 팔을 걸고,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다. 기찻길에 풀어놓은 다리가 칡넝쿨처럼 뻗어나간다. 일사천리 뻗어나가던 내 상상의 칡넝쿨은 택배기사 전화벨 소리에 그만 선로를 이탈하고 만다.

    미완성된 시를 파일에 저장해놓고, 철길 옆에 앉아 있다. 기차가 지나가면 선로가 얼마나 뜨거운지 확인해보려고. 심장이 뛴다. 기차가 가까이 다가온다. 저만치 멀어져간다. 나는 살며시 선로에 손을 얹는다. 어, 차갑다! 얹은 손을 떼지 않고 가만히 있다. 마치, 터질 것 같았을 그 남자의 심장처럼 강하게 전해오던 진동이 서서히 잦아든다.

    이제 뛰지 않는다. 이제 보이지 않는다.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제 남문산역에 기차가 들어오지 않는데 가좌동 신설된 진주역까지 날아서 갈까, 뛰어서 갈까? 선로를 이탈한 내 상상의 칡넝쿨은 새 선로로 갈아탄다.

    미장원에서 만난 봉숙이가 들려준 “통학기차가 남산 모퉁이에서 속도를 줄이면 남학생들이 막 뛰어내렸어요. 마치, 시커먼 까마귀들이 후두둑 떨어지는 것 같았다니까요. 역까지 가면 문산중학교까지 많이 걸어야 되니까요.” 또 봉숙이는 “우리 집은 기찻길 바로 옆에 있는 탓에 자매가 넷이에요. 새벽잠을 자주 깨신 아버지 때문이래요.” 딸이 많아서 그런 말을 듣는다는 봉숙이의 기차에 대한 기억들이 이제 추억 속으로 묻힌다.

    기차가 오거나 말거나 나의 시는 내가 흔들어 깨우겠지만, 기찻길 옆 사람들은 잠을 깨지 못한다. 잠이 들지 못한다. 기차와 더불어 웃고 울던 사람들은 이제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혼란스럽다. 이사온 지 채 몇 달 안 되었는데 버릇처럼, 나는 창밖을 내다본다. 귀를 기울인다.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다.

    박영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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