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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 선견지명(先見之明)- 남보다 먼저 보는 현명함

  • 기사입력 : 2012-11-20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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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 1917~2000) 선생은 고향 안동에서 23세 때까지 한문을 공부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늦은 나이에 전문학교, 대학, 대학원을 마치고 문학박사를 받고, 성균관대, 연세대 등에서 교수를 지냈다. 그동안 근 100여 권의 저서를 내었다.

    연민 선생은 다른 교수와 마찬가지로 한글로 논문을 썼지만, 다른 교수들과는 달리 한문으로 논문을 쓰기도 하고 한문으로 계속 글을 지었다. 지금 남아 있는 한문으로 된 시가 3000수, 문장이 3000편 정도에 이른다.

    그 당시 선생이 한문으로 시문을 짓고, 논문 쓰는 것을 보고서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다. “시대에 뒤떨어진 짓 하고 있다. 한문으로 쓰면 누가 볼 것이냐?”, “할 일이 없으니까 쓸데없는 짓 하고 있다”고 했고, 한문학계에 상당히 이름이 있는 모 대학의 한문학과 교수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라고 매정하게 잘라 무시했다.

    선생은 5~6년 단위로 한시문을 모아 한문 문집을 내어 읽을 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또 70세 되던 해에는 22책 분량의 <李家源全集>을 출판하여 국내외 각 대학, 연구소, 전문연구자들에게 무료로 기증했다. 그러나 선생으로부터 한문으로 된 책을 기증받은 사람들은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심지어 자주 선생의 문하를 드나들던 제자 가운데도 기증받은 책을 바로 헌책방에 팔아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필자는 각지의 헌책방에 가서 연민선생의 책이 보이면 다 수집하기 때문에 선생으로부터 기증받은 책을 서점에 판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다. 선생이 한문으로 지은 시문집이 천대를 받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난 10월 말에 선생의 대표적인 저서인 <한국한문학사(韓國漢文學史)>가 중국에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번역자는 남개대학(南開大學) 중문과의 조계(趙季) 교수와 그 제자 유창(劉暢)이다. 이들은 자기들이 한국에 와서 책을 구해서 계획을 세워 번역하여 남경의 봉황출판사(鳳凰出版社)에서 출판했다.

    우리나라 책이 중국어로 번역되면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학계에 다 소개될 수 있다. 요즈음 미국이나 유럽 대학의 교수 가운데는 한문을 열심히 공부해 잘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 우리가 중국과 가깝고 오래 교류를 했기 때문에, 중국을 제외하고는 한문을 한국학자들이 제일 잘하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착각이다. 한국 학자보다 한문 실력이 나은 서양 학자들이 수두룩하다.

    <한국한문학사>를 번역한 조계 교수가 이번에는 연민 선생이 지은 한문 문집을 중국에서 출판하자는 것이다. 봉황출판사에서도 찬성하였다. 조 교수가 중국에서 출판하자는 이유는, 한국에 이렇게 훌륭하고 수준 높은 한시문을 짓는 학자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중국은 1949년 공산당이 집권한 이후로 계속 무슨 운동이나, 무슨 회의 등으로 인해서 학자들이 공부에 몰두할 수 없게 만들었고, 1966년부터 76년까지 11년 동안은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전통문화를 파괴하고 학자들을 핍박하고 모욕을 주었다. 그래서 중국에도 연민 선생만한 수준의 시문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조계 교수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홍콩의 왕춘홍(汪春泓) 교수 등 여러 중국 교수들이 주장했다.

    머지않아 연민 선생의 한문으로 된 시문집이 다시 중국의 저명한 출판사에서 출판되어 중국은 물론 전 세계에 퍼져 나갈 것이다. 선생이 한문으로 글을 짓는다고 비웃던 사람들은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연민 선생이야말로 선견지명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연히 이렇게 된 것이 아니고, 자기가 한문으로 지은 시문집의 서문에 이런 상황을 예견하였다.

    * 先 : 먼저 선. * 見 : 볼 견.

    * 之 : …의 지. * 明 : 밝을 명.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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