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우동- 정일근(시인)
- 기사입력 : 2013-03-14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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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비우동 -희섭에게
- 정일근 시인
진주 시외버스 터미널 앞
밤부터 새벽까지만 문 여는
냄비우동 가게 있다
스무 해와 서른 해 사이쯤의 나이로 앉은
늙은 양은 냄비에서 우동이 끓는다
막차를 타고 떠날 사람들과
막차를 타고 돌아온 사람들이
냄비우동을 기다리며 말없이 앉아있다
시인 박희섭 내게 그 냄비우동 한 그릇 사주고
가는 곳이 어디인지
알려주지도 않고 세상 떠났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묻지 않고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는다
그가 떠난 자리에 앉아
냄비우동 끓기를 기다리며
나도 나의 막차를 기다리고 있다
그 잠깐 사이 냄비우동 가게 주인 부부의
검은머리에 서리가 하얗게 내린다
-시집 <오른손잡이의 슬픔>(고요아침. 2005)
☞ ‘시외버스 터미널’에는 숱한 만남과 이별이 있고, ‘막차를 타고 떠날 사람들과/ 막차를 타고 돌아온 사람들이’ 바삐 모여들어 ‘냄비우동’ 한 그릇으로 회포를 푸는 걸 면발처럼 수없이 볼 수 있다.
시인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어디에서 왔는지 묻지 않고/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는다’고 말한다. 친구 박희섭은 늦깎이 시인으로 등단했다고 기뻐했는데, 무엇이 바빴는지 그 친구는 등단해 시인으로 115일을 살다 세상을 떠났다. 같은 캠퍼스에서 만난 인연으로 나중에 친구가 시인이 되기까지 큰 힘을 보탠 정일근 시인의 진한 우정이 우러나는 작품이다. 가슴이 짠해진다.
박희섭 시인의 유고시집이 세상에 나오길 기대해 본다. 박우담(시인)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