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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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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텃밭’이란 이름의 유전자- 조민(시인)

  • 기사입력 : 2013-07-09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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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텃밭상자라는 말, 참 재미있다. 보석상자도 사과상자도 과자상자도 아닌 텃밭상자! 상추와 근대와 대파와 쑥갓을 키우는 상자, 텃밭을 키우는 상자라고? 묘하다. 텃밭과 상자의 조합. 어쨌든 텃밭상자는 텃밭이다.

    텃밭상자는 간이텃밭이다. 일단 규모면에서 그렇다. 시간도 비용도 적게 들어서 누구나 맘만 먹으면 시작할 수 있다. 간단하고 손쉬운 미니어처 텃밭이다. 망해도 좋고 안 망하면 더 좋다. 아무런 부담이 없다. 또 누구라도 언제나 어디서나 쉽고 간편하게 옮길 수도 있다. 휴대도 가능하다. 맘 내키는 곳에 내 맘대로 가져갈 수도 있다. 책상 위도 텃밭, 베란다도 텃밭, 사무실도 텃밭.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 어디서나 씨를 뿌리고 모종을 옮기고 열매도 딸 수 있다. 전천후 텃밭이다.

    텃밭상자의 원조는 텃밭화분이다. 집 밖에 있던 텃밭물통과 텃밭고무다라이가 집 안으로 들어가서 실내텃밭, 베란다텃밭이 된 것이다. 진화인지 퇴화인지 모르겠지만 실외에서 실내로 이동한 것이다.

    텃밭고무다라이는 지금도 곳곳에 많다. 동네마다 집 앞에 줄줄이 문패처럼 서 있고 보초처럼 서 있다. 그것들은 잃어버린 우리들의 텃밭과 남새밭을 조용히 지켜온 텃밭의 고유 유전자들이다. 문 안이 아니라 문 밖에서 비바람과 눈을 맞으면서 텃밭의 유전자를 이어오고 지켜온 것이다. 이것들이 지킨 것은 텃밭이 아니라 밥상. 그 옛날 텃밭이야말로 우리들의 생명이고 연명의 근원이 아니었던가!

    어쨌거나 텃밭상자는 지금 친환경과 유기농을 선호하는 현대인의 심리와 정서를 반영시켜 여러 가지 방법과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특히 지자체의 적극적인 홍보와 활동이 돋보인다. 텃밭상자가 도시농업을 주도하고 궁극적으로 녹색도시로 가게 하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지속적으로 무료로 텃밭상자를 분양하고, 홈피를 통해 작물 재배 방법과 경작법 등을 안내해주고 있다. 귀한 일이다.

    알뜰살뜰 살림꾼 블로그도 참 많다. 꼬박꼬박 텃밭상자 일기를 써서 귀중한 정보를 공유하고, 텃밭정원을 가꿔서 여러 사람들에게 무료로 분양하는 농장주인도 늘어나고 있다. 여러 가지 채소를 직접 재배해서 수확하는 기쁨과 노동의 기쁨을 함께 나누려는 동네 이웃들도 또한 점점 더 불어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빈 터만 있으면, 흙만 있으면 씨앗을 뿌리는 것일까? 작은 상자에라도 텃밭을 만들어 채소를 가꾸려는 이 심리는 뭘까? 두말할 것도 없다. 아득한 옛날 조상들의 농경유전자가 여전히 우리 몸 속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수만 년 전에 씨를 뿌리고 풀을 베고 수확을 하던 신석기인의 농경 유전자가 우리들의 피돌기를 따라 흐르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텃밭본능, 농경본능이 우리들의 몸속에 잠재돼 있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다. 못 말린다. 말릴 수도 없다. 땅을 보면 못 참는 손의 본능! 비료값은커녕 빚만 지는 형편이지만 한 뼘도 안 되는 자투리땅에도 고랑을 지어 부추와 대파를 심는 흙의 마음, 흙의 손은 어쩔 수가 없다. 수지가 맞든 안 맞든 관계없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지 않은가! 땅은, 흙은 삶의 근원이고 어머니고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다.

    귀농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성공한 귀농인도 꽤 많다고 한다. 그러나 성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흙으로 돌아가서 흙이 되려는 사람들, 흙과 함께 사는 지혜를 터득하고 그것을 입에서 입으로, 손에서 손으로 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 소중하고 또 소중할 뿐이다. 흙 속에서 흙과 함께 사는 기쁨, 자연의 이치와 섭리에 진실로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귀농의 첫 단계일 것이다.

    기계문명의 발전이 절정에 달하고 있다. 언젠가는 내가 인간인지 기계인지 모르는 순간이 곧 도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우리의 몸속에 농경이라는 유전자가 살아 있어 텃밭상자를 만드는 한 이 땅에서 우리는 여전히 인간으로 존재할 것이다.

    조 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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