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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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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비밀이 없는 자는 가난하다- 서연우(시인)

  • 기사입력 : 2013-11-08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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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무래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노부부가 있다. 일제강점기 후 국가로부터 토지를 불하받아 몇 년에 걸쳐 상환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된 등기권리증을 받고, 그 땅에 손수 뼈대를 세우고 흙을 바른 집도 짓고 자식농사 밭농사 지으며 60년 가까이 그곳에서 사는.

    어느 날 노부부를 좀 더 편안하고 멋진 집에서 모시고 싶었던 큰아들에게 새집의 설계를 의뢰했던 건축설계사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말이 전해진다. 토지세, 재산세 꼬박꼬박 내며 살아온 그들의 땅이 집이, 그들의 명의가 아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친형제보다 가까이 지낸 사람의 아들 명의로 등기부 등본에 등재되어 있어 집을 지을 수 없다고.

    명절 때마다 아제라 부르며 인사 와선 늘 건강을 염려하던 그래서 처음엔 돌려 드려야지요 했던, 하지만 이제는 땅값을 일부 내고 명의를 가져가라는 자기 땅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그와 법의 심판을 기다렸다. 법은 거짓말투성이인 그의 손을 들어줬다. 등기부상의 몇 글자가 증거이며 국가가 나서서 한 일은 세상이 다 알고 몇 년을 살았고 어떻게 살았느냐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고 뒤집을 수도 없다고.

    모든 것을 할아버지에게 맡기고 평생 일만 하신 할머니의 눈에 일기예보에도 없던 눈물비가 하염없이 내린다. 자식들 학비 보태려 땅 한 뙈기 팔려고 해봤으면 알 수 있었을까? 아들 사업자금 대주려 담보대출 신청 한 번 해봤으면 알 수 있었을까? 남의 땅 자기 땅도 구분 못하고 등기한 그 영감이 죽기 전에 알았다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텐데, 부지런하면 뭐든 잘될 거로 생각했던 할머니는 애가 끓다가 숯불에 떨어진 삼겹살 기름처럼 탄다.

    어떻게 많지도 않은 자기 땅 하나를 제대로 못 챙겨 남이 등기를 해도 모르면서 온갖 똑똑한 척은 다 하셨느냐며, 할머니의 돈보다 동네 창피해 얼굴을 들 수가 없으시다 60여 년 감히 하지 못한 잔소리와 원망에 할아버지는 변명 한마디 못하신다. 할아버지의 생에 꼭 돌아가고 싶은 하루가 있다면 80년 부동산 특별조치법이 시행된 그날일까, 남의 땅을 번지가 같은 옆의 자기 땅과 착각해 등기해 놓은 그 영감이 10년 전 죽기 전의 어느 하루일까.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시대를 살았고, 1년 내 농사지어 겨우 굶지 않고 사는 정말 법이 없어도 살 그분들에게 법을 만들고 법이 필요한, 그들과 그들에게 필요하다고 만든 특별조치법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시인 이상이 비밀이 없는 자는 가난하다고 했던가. 세상에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벌을 받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다. 칼같이 꼿꼿이 서서 아무렇지도 않게 꿀꺼덕 검은돈을 먹은 하얀 갈치에게 사소한 배려를 바란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만든 진실보다는 살아온 진실이 아는 사람에게만 유리한 법에 미행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 또 없는 것이 돈이라지만, 나는 가끔 로또로 얼마가 당첨되면 나와 내 주변이 돈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몽상에 잠긴다. 높은 곳에 올라야만 사람들이 쳐다보는 세상에서 낮은 곳에서만 살아 그들의 삶이 더 질퍽질퍽해지는 모습을 멀찌감치 서서 지켜보기만 하는 나는 어딘가로 지금 여기를 떠나보내고 싶다.

    오늘은 자꾸 멀어지는 은행잎을 다독여 줄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할머니의 눈물비를 지워 주고 넘어지지 않게 흔들리지 않게 감싸 줄 선물포장 상자 속에 든 뽁뽁이같이 그들의 빈 공간을 채워줄 이슬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서연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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