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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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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도로명 주소 편리하십니까- 강태구(부국장대우 사회2부장)

  • 기사입력 : 2014-01-23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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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흐지부지될 줄 알았다. 처음부터 국민은 그것이 먼 남의 나라 얘기인 양 무관심했다. 그러나 강행하니 불편하다.시행한 지 23일째 되는 ‘도로명 주소’ 이야기다.

    도로명 주소는 지난 1997년 김영삼정부가 생활의 편리성과 함께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한다며 처음 도입했다. 이후 2011년 7월 옛 동 주소와 병기하다가 올해부터 전면 시행했다. 정부는 도로명 주소가 체계적이기 때문에 길 찾기가 쉬워 화재나 범죄 등 긴급상황에 조속히 대응할 수 있고 시간·물류비 절감, 사회·경제적 비용 감소, 국가경쟁력 강화 등 장점만 부각했다.

    그러나 정작 이 주소를 사용해보니 배달업무 종사자가 불편할 뿐만 아니라, 내가 평생 살아왔고 살고 있는 동네 이름이 사라지니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다. 게다가 바뀐 자기집 주소도 잘 모른다. 동 이름 주소를 없애니 택배 배달사고에 소송까지,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제는 고려, 조선시대부터 아니면 그 이전부터 사용해왔던 동네 이름인 밤나무골이나 밤실을 율곡리, 대나무골이나 대실은 죽전리로, 배나무골은 이천리 등으로 변경했다. 순우리말 동네 이름을 한자 (漢字)로 적을 수 없으니 일제는 한자식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비록 일제에 의해 만든 동 이름이긴 하지만 100년을 사용해 몸에 익은 것을 어느 순간부터 ‘○○로 ○번길’로 바꾸려고 했으니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동(洞)은 일제시대 이전에도 있었다. 동(洞)은 동천(洞天)의 준말로 스키장으로 유명한 무주구천동, 함양 마천의 칠선계곡 초입의 두지동, 하동 화개면 의신마을 들머리의 선유동처럼 첩첩산중 산으로 둘러싸인 곳을 말한다. 이런 동네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 크기가 대개 손바닥만하다. 이런 곳을 동(洞)이라 불렀다.

    도로명 주소 사업이 김영삼정부 시절,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등 일제청산 작업과 연계해 벌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올초부터 본격 시행하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택배기사, 집배원들이 바뀐 도로명 주소를 익히느라 애를 먹고 택배·우편물을 배달하기는 이전 주소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급기야 도로명 주소에 옛 동 이름, 지번을 병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도로명 주소를 옛 동 이름, 지번주소로 바꿔주는 전환시스템까지 개발됐다고 한다. IT강국 대한민국에서 사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게 무슨 짓이냐며 웃어야 할지.

    우리나라 마을은 자연발생 마을이 많아 서구의 계획된 도시, 바둑판식 도로와 비교해 ○○로 ○○번길 하면 ○○동 번지로 사용하는 것과 비교해 공간지각력이 떨어진다. ○○로가 수㎞에서 수십㎞에 걸쳐 그것도 직선도로가 아닌 구불구불한 길에 있으니 이것만 보고는 어디쯤 위치하는지 모른다. 차리리 일제시절 동 주소는 대략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고 반기를 드는 이도 있다.

    이 제도를 도입한 정부는 어리석은(불쌍한) 국민을 긍휼히 여겨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 같은 위민정신으로 했을까 묻고 싶다. 어쭙잖은 서구식 따라하기, 행정관료들의 탁상행정이 부른 불편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국민의 정서는 도외시하고 ‘까라면 까지, 뭔 말들이…’라는 옛날 군대식 발상까지 더해진 것 같아 화가 난다.

    도로명 주소로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나 집 주소를 몰라 정작 자기 명함을 보고서야 아는 현실을 정책 당국도 알 터인데.

    도로명 주소 시행한답시고 도로표지판 교체 비용과 홍보비까지 정부는 적지 않은 예산을 쏟아부었다. 덜컥 시행해버리니 국민들은 잘 모르고 정책을 도로 물릴 수도 없고 참 난감한 지경이다.

    이 제도가 정착되려면 짧게 10년, 길게는 한 세대 30년이 더 걸릴지도 모른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모든 국민에게 영향을 주는 사안을 결정하면서 여론수렴 과정을 등한시한 탓이다. 제발 ‘저질러 놓고 보자’ 식의 정책은 더 이상 안 나왔으면 좋겠다.

    강태구 부국장대우 사회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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