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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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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경남의 현주소 (1) 살아남은 자의 고통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고요? 기억은 그 순간에 멈춰 있어요
본인 탓이 아닌데도 스스로 자책하고
사고현장 보거나 스치기만 해도 가슴 답답

  • 기사입력 : 2014-10-31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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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8월 26일 밤 김해시 주촌면 부경양돈농협 축산물 공판장에서 화재가 발생, 소방대원들이 화재현장으로 투입되고 있다./경남신문 DB/




    2003년 9월 태풍 매미 19명 사망. 2013년 8월 김해 생림면 폐타이어공장 화재 소방관 1명 사망. 2014년 8월 마산 진동 시내버스 침수사고 7명 사망.

    재난사고 피해는 사상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까지 감안하면 곱절로 늘어난다. 고통은 신체적인 것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의 공포는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커다란 정신적 상처를 남긴다.

    일부는 심할 경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를 안게 돼 일상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이에 5회에 걸쳐 PTSD의 위험군과 도내 대응기관 및 현실을 조명한다.

    ◆살아남은 자의 고통= 이정훈 소방사는 “이런 인터뷰…, 안 했으면 좋겠다. 답답하다”고 말했다. 본인 탓이 아닌데도 그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이 소방사의 기억은 지난해 8월 17일에 멈춰 있었다. 사고는 김해에서 일어났다.

    이날 자정 무렵 김해시 생림면 한 폐타이어 공장에 불이 났다. 공장 2개 동이 타고 소방서 추산 1억3000만원 상당의 재산피해를 낸 큰불이었다. 먼저 현장에 투입된 생림 119안전센터 소속 김윤섭 소방장(당시 소방교)은 가장 앞에서 화재진압용 호스를 들고 불을 껐다. 잠시 뒤 공장으로 불이 옮겨붙자 김 소방장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장비를 챙겨 자리를 옮겼다. 동료였던 이 소방사는 당시 탈수증 탓에 옆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소방사는 “내가 정신이 없어도 그때 쉬라고 좀 잡았어야 했는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소방사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김 소방장은 이날 오전 7시께 인근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 소방사는 “손발이 저리고 머리가 어지러웠고…”라고 기억을 힘겹게 끄집어냈다. 현장에 있던 또 다른 소방관인 유동곤 소방교는 “한밤중인데도 날씨가 아주 더웠다. 화재 복사열이 상당한 데다 방화복 자체가 두꺼워 몸의 열을 밖으로 배출할 수 없었다”고 했다.

    화재 현장은 급박하다. 누구를 붙잡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이 소방사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그는 “출동하다 보면 동료를 잃었던 장소를 지날 때가 있다”며 “돌아서 가고 싶지만 빨리 가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바람이 불면 매미가 온다= 정계환 태풍매미유족회 대표의 기억은 지난 2003년 9월 12일에 머물러 있다. 그는 “걷다가 바람이 불었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고 친구가 ‘미쳤나 보다. 왜 우냐?’고 했다”며 “내가 ‘바람이 너무 심하고 그래서…. 일이 있나 보다 해라’고 대답했다”며 “바람이 불면 우울하다”고 말했다. 이날은 태풍 ‘매미’로 마산 앞바다가 물에 잠긴 날이었다. 그는 이날 이듬해 결혼을 앞둔 아들 정시현씨와 예비 며느리 서연은씨를 잃었다.

    정 대표를 만난 날은 공교롭게도 제19호 태풍 ‘봉퐁’이 남해에 강풍을 몰고 온 지난 13일이었다. 바람 탓인지 횡단보도를 건너는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는 “아들이 마산 남부터미널 건너편 지하에 갇힌 사람들을 구하러 들어갔다가 다시 못 나왔다. 아까운 아이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나, 그 또래 친구들을 볼 때면 아들이 많이 생각난다. 대학에 강의를 나갔다가 힘들어서 나와서 울고 들어갈 때도 있었다”고 했다.

    정 대표는 또 “사고 이후 아내는 우울증 약을 먹고 있다. 아내가 계속 우는 바람에 나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며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며 한 병 두 병 마시던 술이 어느새 제법 늘었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막연하게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는 생각은 안 된다”며 “박물관 등 또 다른 매미 참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그날을 회상하고 반복을 막기 위한 시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간은 아픔을 공유한다= 사고의 피해는 당사자와 가족들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본 누군가도 경험한다. 여기 창원의 한 아파트 경비원 사례도 마찬가지다.

    창원의 한 아파트 경비원 A(63)씨는 지난 4월 새벽 출근길에 여고생 주검을 마주했다. 여고생이 이 아파트에서 투신한 것이다. A씨는 “나이가 많은 사람도 보고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가족이 아니라도 어린 아이의 주검을 보는 건 힘든 일이다”며 “손주뻘 되는 여자 아이였고 심장박동수가 빨라졌다”고 말했다.

    A씨는 여전히 그 아파트에서 일하며 경비실에서 사고 장소를 지켜보고 있다. A씨는 “야간 경비근무를 설 때, ‘툭’하고 부딪히는 소리만 나면 가슴이 철렁하다”며 “피곤해서 쪽잠이라도 들 때, 가끔씩 그 장면이 떠오른다. 심장이 두근대고 평소에도 피로감에 몸에 힘이 없고 우울해진다”고 토로했다. A씨는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드러내놓고 하기는 어렵다. 유족의 고통, 아파트 입주민의 집값 걱정 탓에 소문을 냈다가 일자리를 잃을까 두렵다”고 했다.

    정신적 상처= 앞서 언급한 이들은 PTSD 진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다. 굳이 꼽자면 이들은 위험군에 속한다.

    올해 소방방재청이 발표한 ‘재난심리지원 추진계획’에 따르면 재해의 범위는 풍수해, 폭설, 폭염·한파, 적조, 화재, 교통사고, 폭발, 산불, 항공기, 기타 등으로 구분된다. 종류별로는 지난해 풍수해가 944건(32.5%)으로 가장 많았고, 화재가 447건(15.4%), 폭염·한파 417건(14.4%), 교통사고 370건(12.7%) 등으로 전체 75%를 차지했다. 재난의 범위는 넓고 심리적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다. 대형 재난사고와 전쟁 등을 겪었다고 해서 모두 PTSD가 초래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적절한 예방·치료가 필요하다.

    배정이 인제대 간호학과 교수는 “우리는 세월호 사고와 마산 태풍 매미 사고 등을 겪은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아픔에는 공감하고 위로해 줘야 한다”면서도 “모든 사고 피해자들이 PTSD를 겪는 것으로 단순히 치부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자연재해, 화재, 교통사고를 포함한 인재사고 등 충격적인 사고를 경험한 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불안, 우울 등 심리적 반응이 뒤따르는 증상을 말한다.

    정치섭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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