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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일기 (9) 이토록 감각적인 이별영화- 중경삼림

  • 기사입력 : 2015-07-23 14:3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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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지막이니 뭔가 '강렬한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다. 몇 주전부터 내내 생각했다. 어떤 영화를 고르면 좋을까.

    사실 마음에 담아둔 영화는 있었다. '반칙왕'. 대학생일 때 처음 봤는데 그때는 그냥 웃긴 b급 코미디구나 했다. 그러다 회사생활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하던 때 문득 생각이 나서 다시 봤다. 보는 내내 생각했다. 아, 나는 왜 이런 명작을 몰라봤던 것인가. 특히 마지막에 송강호가 자신을 괴롭히던 직장상사를 상대로 진지하게 가드를 올리는 장면에서는 벅차오르는 어떤 감동을 느꼈다.(물론 마무리는 끝까지 b급 정서를 잃지 않는다)

    하지만 반칙왕을 주제로 일기를 쓰려고 하니 곤란한 부분이 많았다. 일기 속 등장인물이 매우 명확할 수밖에 없는 점이 큰 부담이었다. 몇 번 고민한 끝에 당장은 퇴사할 계획이 없으므로 쓰기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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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 한 달째 되는 5월 1일, 경찰 223은 그간 샀던 파인애플 통조림 30캔을 모두 먹어치운다.
    마지막 영화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로 골랐다. 내 영화 역사의 시작이자 보자마자 한눈에 반한 영화. 아마 중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당시 집에는 전 주인이 남기고 간 음악CD가 한 박스 있었다. 어느 날 박스를 뒤적이다(대부분은 내취향이 아니었다) 표지가 독특한 음반이 있어서 틀어봤는데 음악이 꽤 마음에 들었다. 여러 개의 사진이 조각조각 모자이크 된 음반 표지에는 큼지막한 한자가 쓰여 있었다. '중경삼림'
     
    비디오 가게서 빌려온 낡은 비디오테이프를(주인아저씨가 구석에서 찾아줬던 기억이 난다) 재생시킨 후 90여분간을 푹 빠져서 봤다. 중학생일 때니까 뭐가 어떻게 좋다는 건지는 잘 몰랐지만 그냥 그 영화가 너무 좋았다. 화면도, 대사도, 음악도. 그래서 생각날 때마다 다시 봤다. 고등학생일 때도, 대학생일 때도, 서른살이 된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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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생일에 조깅을 하는 경찰 223. 그는 온몸에 수분이 빠져나가면 눈물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중경삼림은 이별에 관한 영화다.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경찰 223과 경찰 633의 이야기. 두 주인공은 모두 실연을 당한 상태다.(한마디로 차였다) 영화는 이들이 나름의 방법으로 실연을 극복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경찰 223은 여자친구와 4월 1일에 헤어졌다. 매일 밤 그녀를 그리워하면서 삐삐의 음성메시지를 확인하지만 도착한 메시지라고는 친구가 조깅 시합을 하자는 내용뿐이다. 그는 그녀가 떠나간 날부터 매일 파인애플 통조림을 한 캔씩 사 모은다. 기한이 5월 1일인 것으로. 파인애플은 헤어진 여자친구가 가장 좋아하던 과일이다. 그는 한 달이 되도록 여자친구가 돌아오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잊기로 한다.

    경찰 633도 연인과 헤어졌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버렸고 그는 그녀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며 매일 밤마다 집안의 물건들과 대화를 나눈다. 닳아서 홀쭉해진 비누에겐 "그녀가 떠났어도 넌 자신을 잃지마"라며 중얼거리고 추억이 깃든 커다란 인형을 보면서는 "누구나 실수는 하니까. 그녀에게 기회를 주자"라며 쓰다듬어준다.
     
    나에게 '실연'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미지의 영역이었다. 영화를 그렇게 여러 번 봤으면서도 주 소재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셈이다. 영화 속 경찰 233의 나이인 스물다섯이 될 때까지도 그랬다. 스물다섯의 233은 이별의 상처로 방황하고 있었지만 스물다섯의 나는 토익시험 공부와 인턴을 알아보느라 바빴고 여전히 그의 감정을 공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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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스트푸드점 종업원 페이와 단골손님 경찰 633. 페이는 매일 들르는 경찰 633을 짝사랑하게 된다.
    나는 스물여덟이 되던 해 처음으로 이별을 경험했다. 처음엔 별생각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졌다. 문득 한 번씩 참을 수 없는 감정들이 밀려올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이 영화를 봤다.

    경찰 633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이따금씩 집에 있는 물건들에게 말을 걸었다. 선물 받았던 커다란 곰인형을 쓰다듬으며 "내가 잘못했던 게 많았나보다"고 고해성사를 했고 자주 신던 신발을 가만히 쳐다보면서 "넌 아직 그대론데 왜 사람은 변했을까"라며 중얼거렸다.

    그는 마지막으로 나에게 구두를 선물했었다. 나는 그 구두를 그대로 둔 채 신지 않았다. 경찰 223이 한 달 간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 모으며 그녀를 기다렸던 것처럼 나도 그랬다. 그 구두를 신어버리면 뭔가 정말 끝나버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찰 223이 한 달 후 '그녀에게 나는 유통기한이 있는 파인애플 통조림이었다'고 깨달았던 것처럼 나도 깨달았다. 그 구두는 아무 의미도 없는 물건이라는 걸.

    헤어진 지 한 달 째 되던 날 233이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두 먹어버린 것처럼 나도 한 달 후 그 구두를 꺼내서 신고 나갔다. 그러고 나니 완전히는 아니었지만 조금은 나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가장 사랑하는 영화를 보며 사랑했던 기억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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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경찰 633의 집을 몰래 찾아가 청소를 해주는 페이. 그녀는 그의 집에서 예전 여자친구의 흔적을 지운다.
    여전히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이별을 겪기 전에도, 겪어본 후에도 그렇다. 10여년이 지나도록 수십 번을 봐왔어도 오프닝이 음악이 흘러나올 때면 기분이 좋아진다.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한다. 중학생이던 그 때, 이 영화를 알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처럼 영화를 좋아하게 됐을까. 그 때 이 영화를 몰랐다면 영화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지금 이 글도 쓰고 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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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 후 재회한 경찰 633과 페이. 그녀는 스튜어디스가 됐고 그는 단골이던 패스트푸드 점을 인수했다.
    시간은 계속 흐른다. 영화 속 경찰 223은 여전히 스물다섯이지만 나는 10대 소녀였던 시절과 20대를 지나 30대가 됐고 앞으로 40대, 50대가 될 것이다. 40대, 50대가 돼서도 지금처럼 이 영화를 이렇게 사랑하고 있을까?

    이 영화와 함께했던 내 젊은 시절의 기억, 지금의 감수성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경찰 233의 말처럼 기억이 통조림에 들었다면 기한이 영영 지나지 않기를 바란다. 꼭 기한이 있어야 한다면…만년 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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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단영화소개>

    왕가위 감독의 1994년 작품. 국내 개봉은 1995년. 왕가위 감독이 동사서독을 오랫동안 찍으며 심신이 지쳐있던 시절, 약 일주일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만들어 낸 영화다. 국내 개봉 당시 큰 인기를 얻으며 홍콩 영화 붐을 일으키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특별한 줄거리 없이 카메라 워크와 대사(내레이션), 음악만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포인트. 특히 음악의 역할이 크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 삽입된 마마스앤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g은 영화를 봤다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곡. 금성무와 양조위의 젊은 시절 미모를 감상하는 즐거움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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