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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기자] 다시쓰는 7번 국도 (3) 강릉 청학사(靑鶴寺)

우리, 눈송이처럼 꽁꽁 뭉치자

  • 기사입력 : 2016-03-11 14:3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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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부 김언진
     
    출발한 지 거의 10시간만에 최종 목적지인 '청학사'에 도착했다. 마산에서 출발해 강릉까지 380㎞가 넘는 거리를 무사히 도착한 우리에게 일단 뜨거운 박수. 짝짝짝.

    절에서 하룻밤을 묵는 것은 난생 처음이라 도착하기 전부터 무지 설렘.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우리가 묵을 방으로 들어갔다. 바닥이 절절 끓는게 완전 내 스타일.

    대충 씻고 이불을 깔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눕자마자 바닥과 닿은 몸이 눌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으으, 나는 아마 평생 여기서 일어날 수 없을거야.'라고 생각하며 선배들이 누운 방향으로 고개만 살짝 돌렸다. 한 마디도 안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셋이 나란히 누워있는데 문득 '그저 한 직장에서 만난 동료인 우리가 왜, 어떻게 이렇게 친해졌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점이 유난히 많기는 했지만, 이것만으로 무조건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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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절 끓는 방 앞에 나란히 놓인 신발 세 켤레.

    나는 우리 셋 중 입사가 가장 늦은 막내다. 내가 회사를 막 들어왔을 때 두 선배는 모두 사회부 사스마와리(경찰 출입기자)였는데, 덕분에 '선배들 꽁무니 졸졸 쫓아다니기'가 업무의 전부였던 수습기간 3개월 동안 나는 이 두 선배들을 누구보다 더 자주, 오래 봐야했다. (아무래도 자주 부대끼다보니 친해졌나 싶기도 하고.) 어쨌든 지금부터는 그동안 대외비(對外秘)였던 선배들의 이야기를 해볼까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두 선배 모두 첫 인상은 그저그랬다. 대학도 졸업하기 전에 입사해서 뭐가 좋고 나쁜지 판단조차 서지 않던 시기였으니 '아무 생각이 없었다'가 더 적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2013년 11월에 입사해서 2월까지 겨우내 수습 생활을 했는데, 이 때 선배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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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의 케미를 자랑하며 청학사 공양간에서 폭풍 설거지 중인 두 선배님들.

    희미한 새벽별을 길동무 삼아 어둠을 헤치고 새벽 여섯시쯤 경찰서 기자실에 도착하면 의자에 푹 파묻힌 선배를 볼 수 있다.(당시는 석간이라 아침 일찍 출근을 했다.) 두 분 다 추위를 많이 타시는지라 담요며 목도리며 방한이 될만한 것들을 뭘 많이 칭칭 감고 계셨다.

    선배들은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데리고 경찰서 형사계며 교통조사계를 휘젓고 다녔다. 퀭한 얼굴을 한 선배는 한 쪽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당직 형사들을 깨워 밤 사이에 있었던 사건 사고들을 취재했다. 내 눈에는 '누구의 몰골이 더 말이 안 나오는가' 대결을 벌이는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낮에는 주로 현장을 누비며 취재를 다녔다. 취재를 다니다보면 가끔 사람들과 불가피하게 마찰이 있을 때가 있는데, 선배들은 일단 싸움이 붙으면 한 번도 안졌다. 때로는 차분하게 따박따박 따져 묻기도 하고, 고함치며 대거리를 벌이기도 했다.

    옆에 앉아있던 나는 쭈구리가 돼 '와, 저 언니들 진짜 세다'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무서웠으니까. 그런데 내게 일을 지시하거나 내가 쓴 기사를 봐 줄 때의 선배들은 굉장히 친절했다. 차근차근 일러주고 모르는 것도 잘 알려줬다. 방금 전 까지 고함치던 사람이 다정하니 나는 오히려 그게 더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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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에서 키우는 개 복실이는 유경선배의 손길 한 번에 쭈구리가 됐다. 보이는가, 선배의 카리스마가.

    수습딱지를 떼고 나는 사회부에 발령받았다. 슬기선배의 출입처를 그대로 물려받아 다음날 새벽부터 창원서부경찰서 기자실로 출근했다. 3개월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고 매일 같이 두 선배에게 번갈아가며 전화를 했다. 선배들은 귀찮을법도 한데 투정부리는 애인 달래듯 잘 받아줬다.

    그리고 나는 곧 수습때 보았던 새벽의 선배들 모습과 거의 흡사하게 됐다. 오히려 더 심했으면 심했지 결코 덜하진 않았다.(청출어람이라고나 할까.) 안그래도 비슷한 점이 많은 우리 셋은 나의 사회부 경험이 더해지며 공감대가 더욱 확장됐다.

    이제는 나도 어느덧 3년차에 접어들었고 그동안 인사이동으로 부서도 각각 달라졌지만, 공유하는 추억들은 켜켜이 쌓이며 우리의 관계는 두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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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습을 떼고 선배의 출입처를 물려받은 기념으로 슬기선배가 준 초록초록한 선물. 볕이 잘 드는 곳에 놓아두고 물도 듬뿍 주며 정성스럽게 잘 돌보았습니다만, 제가 휴가를 다녀와보니 그만.

    우리는 유경선배의 집을 아지트 삼아 종종 모여 수다를 떨었다. 선배의 집은 우풍이 조금 들긴 하지만 방바닥이 따뜻했다. 이불 속에 다리를 넣고 치킨을 뜯으면 오성급 호텔 부럽지 않았다. 내가 최근 남자친구와 헤어지고(1편을 참고하시라.) 가장 먼저 연락한 사람도 선배들이었다.

    유경선배는 나를 집으로 불러 나의 무너진 멘탈 조각들을 한데로 모아주고 슬기선배와 함께 차곡차곡 다시 쌓아줬다. 내 손을 붙잡고 같이 눈물도 흘려줬다. 그리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전화며 문자로 생사여부(!)를 확인해줬고, 용기를 북돋아줬다.

    물론 이전에도 고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주저 없이 선배들을 찾아 털어놓았고, 선배들은 나를 잘 다독여줬다. 안좋을 때는 안좋다는 핑계로, 괜찮아졌을때는 금세 또 잊어버렸다는 핑계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넬 타이밍을 번번히 놓쳤다. 지금이라도 늦었지만 매번 고마워요. 선배님들.(쑥쓰럽)  김언진 기자 hope@knnews.co.kr
     
     
    ▲문화부 이슬기
     
    눈을 좋아한다. 눈의 결정부터 내리는 모습, 내린 뒤의 풍경과 사람들의 반응까지. 추위를 심하게 타는 체질 덕에 좋아하지 않았던 겨울도 눈이 내리는 계절이라 점차 마음을 주고 있다. 눈이 잘 오지 않는 따뜻한 남쪽에서 사는 것도 눈에 대한 애정을 키웠을 것이다. 눈이 조금이라도 흩날리면 날이 섰던 기분도 이내 눈처럼 둥글어졌다. 눈에겐 마음을 풀어헤치는 뭔가가 있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교통체증을 비롯한 각종 사고 발생으로 눈발을 별로 반기지 않는 사회부 부원들의 곁눈질을 생각하면서도 눈이 펑펑 쏟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한 두 번 가진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하늘에 기우제 아닌 기설제(실제로 존재하던 농경의례라고 한다)도 지내지 못한 탓인지, 여전히 따뜻한 날씨 덕분인지 올해도 생각보다 이곳에선 눈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러니 눈타령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 번 질릴 때까지 보면 이 타령이 덜 할지도 모르는데. 찔끔 내리고 오전 중 사라지는 눈은 눈에 대한 갈망을 높여만 갔다. 친구가 일본 훗카이도 지역을 여행하면서 눈의 고장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선 마음이 더 달았다. 흰 눈 세상 속에 혼자 남겨진 듯한 친구의 사진은 황홀했다. 눈 오는 소리만 들릴 듯했다. 특히 아름다운 곳은 '하코다테'였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함께 가리라 다짐을 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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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가 찾아간 아름다운 일본 훗카이도. 온통 하얀 눈 세상에 홀로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7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다 눈을 만났다. 영덕을 지나니 눈이 폴폴 날렸다. 신이 나는 와중에 더 신이 났다. 다행스럽게도 도로는 이틀 전 폭설이 내려서 출발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는 걱정을 무안하게 만들 만큼 깨끗한 상태였다. 미끄러움이 걱정될 정도로 오는 것은 아니어서 즐기면서 갔다.

    이 지역은 눈이 자주오다보니 눈이 내리자마자 제설차가 다녔다. 빈틈없는 행정에 놀라하며 제설차를 따라갔는데 보기좋게 염화칼슘이 섞인 모래폭탄을 맞았다. (언진아 미안해, 네 차 하부세차 안 하면 부식된다고 했는데, 그랬는데.)

    도로가 말끔한 이유를 몸소 체험하며 강릉으로 들어섰다. 강릉도 시내는 눈이 잘 치워져 있었는데, 우리의 최종 목적지였던 청학사로 들어가는 길은 나무가 우거지면서 길에 쌓인 눈의 양이 많아짐을 느꼈다. 어째저째, 베스트 드라이버 김언진 기자의 역량으로 무사히 청학사에 도착. 청학사에서는 4륜구동도 소용없이 눈에 바퀴가 헛굴러 주차가 더 힘들었지만 일단 온 것이 중요했다. 스님은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고, 체인하나 스노우 스프레이 하나 없이 온 우리들을 대견히 여겨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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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도를 들어와 만난 제설차. 제설차를 따라가다 염화칼슘 모래 폭탄을 맞았다.

    차 시동을 끄고 내리니 설경이 펼쳐졌다. 어두운 밤, 눈이 희붐했다. 가로등 불빛 하나 아래에서만 눈꽃이 떨어졌고 그 속도에 맞춰 풍경이 울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부터 하얘졌다'는 설국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밤의 밑바닥부터 하얘졌다는 표현에서 상상했던 풍경이 눈앞에 있으니 아득했다.

    '청학사 긴 숲길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고 써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계곡 너머 빼곡히 들어찬 나무들 가지 사이 사이에까지 눈이 반짝거렸다. 부러 발길이 닿지 않은 새 눈을 밟고, 만졌다. 그러다 표현 그대로 '꽈당'하고 넘어졌지만 웃어넘길 수 있었다. 눈에 제대로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엉덩이와 팔에 멍이 심하게 든 것을 발견했다.) 갈망하던 눈을 만나 마음이 꽉 들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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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운 겨울밤 눈이 쌓이고 있는 청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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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뽀얗게 쌓인 계곡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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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에서 내다본 겨울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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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에서 내다본 아침.

    아침에 보는 청학사의 설경은 다른 느낌이었다. 방 안에서 빼꼼히 문을 열고 밖을 보니 온통 희었다. 기와 위에 쌓인 눈, 그 끝에 매달린 고드름, 풍경소리가 한 장단을 이뤘다. 스님은 눈 위에 썰매도 탈 수 있다며 썰매를 꺼내주려 하셨지만 우리는 체력과 시간이 모자라 타지 못하고 돌아왔다. 다음 겨울을 기약하면서.

    눈, 겨울 눈, 그것도 강원도 산골 눈을 보고 왔다. 녹으면서 건물 때와 차 매연에 더러워지지 않아 눈에 대한 환상을 더 오롯이 간직할 수 있게 됐다. 눈을 한움큼 뭉쳐 가슴 깊이 쟁여둔 기분이다. 답답할 때 절로 서늘해주길 바라본다. 눈아, 부탁해.  이슬기 기자 good@knnews.co.kr
     
     
    ▲방송인터넷부 김유경
     
    내게 '7번 국도를 탄다'는 건 '강릉에 간다'는 것이고 '강릉에 간다'는 것은 '청학사에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축복이다. 강릉 같은 낯선 타지에 지친 몸을 쉬어갈 넉넉한 부처님 품이 있다는 건.
    따라서 한번쯤 외치고 싶다.
    나, 강릉에 절 있다!(내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냥 한번 이렇게 말해보고 싶었을 따름이다.)
     
    청학사 주지스님과 나는 피를 나눈 사이다.
    법타스님은 내 아버지의 사촌동생.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하던 스무살부터 머리를 시원하게 밀어버린 스님은 불가에 귀의한 후에도 아버지를 각별히 따랐다.
    그러니 자연히 우리 가족과 왕래가 잦았다.
     
    울산의 한 사찰에 계시던 스님이 서울로 올라가 종단의 요직을 지낸 뒤 강릉에 안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였다.
    직장을 잡고 마음의 여유가 생긴 뒤엔 친지들, 지인들과 청학사를 몇차례 다녀갔다.
    봄에는 꽃이 피어서,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져서, 가을에는 하늘이 그윽해서,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서 절은 더욱 아름다웠다.
    7번 국도를 따르는 여정 끝에는 늘 청학사가 있었으니, 이번에도 예외일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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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 늦게 도착한 우리를 위해 저녁공양과 과일, 차를 내주신 스님. 몰래 찍었다.

    늦은 밤, 눈 내리는 강릉에 들어섰다.
    사방이 어두워 후배들은 잘 알아채지 못했지만, 절 초입에는 곧게 뻗은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청학사를 둘러싸고 있는 매봉산 전체가 하나의 솔밭이다.
    대웅전 마당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것도 소나무 숲, 개울 너머 앞산 비탈을 장식하고 있는 것도 소나무 숲이다.
     
    다음날 새벽, 곤히 잠든 후배들 몰래 방을 빠져나와 대웅전 앞에 섰다.
    바람이 매서워 두 손이 자꾸 곱아들었다.
    그때 저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사사사사. 스스스스. 사사사사. 스스스스.
    서글프면서도 경쾌하고 감각적이면서도 단조로운 그 소리.
    바람을 따라 날아오른 수천만개의 눈송이가 솔숲을 스치는 소리.
    윤기를 머금은 솔잎 표면을, 눈 조각 하나하나가 융단을 밟고 계단을 오르듯 매끄럽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그 소리를 낱낱이 다 듣고 그 모습을 샅샅이 다 보았다.
     
    후배들은 몰랐겠지만, 홀로 아침 일찍 경내에 든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2012년 12월의 어느 날, 인천 연수구의 한 중학교 앞 내리막 길에서 자동차와 자전거가 충돌하는 사고가 있었다.
    자전거는 포물선을 그리며 공중을 날았고, 자전거에 타고있던 아이는 그 자리에서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유난히 정이 많고 눈물도 많고 애교도 많던 소년 B.
    4년전, 나는 그렇게 사촌동생 B를 잃었다.
    당시 B의 나이가 15살이었으니, 살아 있었다면 대학 갈 나이가 됐을 거였다.
     
    바로 여기 이 자리에서 매주 49재를 올렸다.
    B의 작고 가녀린 몸은 화장한 뒤 매봉산 주변에 뿌려졌다.
    우리는 인천에서 강릉으로, 한반도 허리를 동서로 가로질러 B의 육신과 혼을 청학사에 데려다놓았다.
    그렇게해서 그해 겨울부터 B는 강릉시 구정면 청학사에 있다.
    그러니까 고쳐 말하자면, 내게 '7번 국도를 탄다'는 건 'B를 만나러 가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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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에서 나와 다시 요사채로 내려가기 직전. 희부윰하게 동이 트고 있다. 수천개의 눈송이가 동시에, 바람을 등에 업고 솔숲을 날고 있었다.
     
    아침공양을 하고 채비를 마친 뒤 청학사를 떠날 때 우리는 다시금 울창한 소나무 숲을 관통해야했다.
    지난 밤 보지 못했던 울울창창한 숲이 서남향으로 펼쳐져 있었다.
    두 후배는 감탄했다. 선배! 정말 멋진 소나무가 많아요!
     
    나는 차창으로 비스듬히 들이치는 햇살을 보며 생각했다.
    눈송이 하나, 솔잎 하나, 작고 어린 영혼 하나. 그리고 지금 여기 우리들.
    우리는 모두 어떤 인연법에 의해 이렇게 얽혀 있을까.
    무엇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고 살아있게 만드는 걸까.
    또 어떤 일들이 우리를 끝없이 좌절케하고 또다시 한껏 고양시킬까.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붙잡게 될까.
     
    그렇게 7번 국도 여행 두번째 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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