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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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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폭염 아래 교각 낙서를 지우는 고교생들- 허충호(정치부 김해본부장·국장)

  • 기사입력 : 2016-08-16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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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한 고교에 재학 중인 A군. 3학년인 그는 최근 학우들과 함께 통학로 변 교각의 페인트 낙서자국을 지우고 있다. 하지만 오래된 페인트 낙서 자국은 시너를 뿌리고 쇠 브러시로 하루 3~4시간씩 문질러도 쉬 지워지지 않는다. A군 등이 폭염도 마다하지 않고 이런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통학로 변의 미관을 위해서다. 그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3년 전, 고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다. 학교로 가는 길에 서있는 교각의 한가운데에 누군가 스프레이 페인트로 낙서한 것이 눈에 거슬렸다. 그는 학교로 가는 길이 깨끗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최근 도로공사를 찾아가 낙서를 제거해 줄 것을 건의했지만 “관할 동사무소의 협조를 받아야 가능한 일”이라는 얘기만 듣고 되돌아왔다. 다시 동사무소를 찾았지만 “도공의 소관업무”라는 답변만 들었다.

    도로공사와 주민센터로부터 즉각적인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A군은 이를 셉티드(cpted; 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 취약 지역의 경관을 개선, 범죄 기회를 차단하고 주민에게 심리적 안전감을 주는 범죄 예방 환경 디자인) 과제로 선정했고 학우들과 함께 본격적인 작업에 나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것은 한 고교생의 봉사활동을 소개하려 함이 아니다. 아직 사회에 발을 딛지도 않은 청소년이 혹여 쇠 브러시로 닦아 내도 닦아 내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소통부재의 현실을 너무 일찍 깨닫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씁쓸함을 토로하기 위해서다.

    행정조직은 매뉴얼을 중시하는 시스템이다. 권한과 권력을 엄격히 구분하고 관할과 소관업무를 지상제일원칙으로 내세운다.

    앞서 언급한 사례는 이런 지상제일원칙에 한 청소년이 좌절감을 느낀 사례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소통부재도 한몫했다고 본다.

    만약 두 기관 간 소통의 벽이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이런 조처가 나왔을 것이다. 도로공사가 소관업무인 교각관리를 위해 관할행정기관의 협조를 받아야 할 일이었다면 즉각 인적·물적 협조를 요청했을 것이다. 주민센터가 관할 구역 내 주민 민원을 적극 처리할 생각이었다면 도공에 협조를 구했을 것이다.

    어린 학생들이 이 염천에 쇠 브러시로 교각을 문질러 댈 수밖에 없는 속사정에는 두 기관이 서로 소통하지 않았거나 소통 의지가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온통 소통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세상이다.

    김해시도 구성원 간의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 지난 1998년부터 운영하던 ‘담당’제를 폐지하고, 수평·탄력 조직인 ‘팀’제를 도입했다. 민원인 우선 조직을 만든다는 취지로 불법행위 단속부서명도 조정해 ‘건축지도’는 ‘건축관리’로, ‘위생지도’는 ‘위생관리’ 등으로 변경했다. 14만6000명이 사는 장유지역에 대한 행정 서비스를 제고하기 위해 ‘도시미관팀’도 신설했다.

    하지만 과연 이런 조직의 외형변화가 조직의 의사구조까지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소통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소통의 목적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다. 조직체계와 이름을 바꾸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성원이 어떤 자세로 업무에 임하도록 만드느냐가 더 중요한 일이다. 폭염에 쇠 브러시로 교각의 낙서를 지우는 청소년이, 진정 행정기관은 필요하고 고마운 존재라는 인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게 소통의 산물이 돼야 한다.

    허충호 (정치부 김해본부장·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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