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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창동·오동동의 영광- 전강준(부국장대우 경제부장)

  • 기사입력 : 2016-12-2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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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 창동·오동동의 옛 영광을 찾기 위한 노력이 힘겹다. 창원시는 이곳에 200억원을 들여 창동예술촌 등을 조성해 사람들을 자연스레 끌어들이려 하고 있으나 쉽지만은 않은 실정이다. 하지만 예전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분명 방문객들의 발길은 늘어났다. 창원시의 도시재생 사업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싶다.

    #2010년 초반= 정확한 해는 기억나지 않지만 2012년쯤으로 기억된다. 당시의 창동·오동동 거리는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저녁이면 예전의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겨우 몇몇만 보일 정도로 황량했다. 친구와 만나기로 한 11월 어느 날. 오동동 코아 옆 거리에 앉아 골동품 등 소품을 파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의 아코디언 연주가 창동·오동동의 옛 영광을 읊조리는 듯했다. 당시 연주했던 곳은 남인수의 ‘황성옛터’였다.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그 연주소리가 폐허처럼 보인 창동·오동동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땐 오동동 거리를 걷는 사람은 정말 찾기 힘들었다. 이곳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오죽 힘들었을까 싶다. 원도심 재생운동이 일어났지만 아직이었다.

    #2009~2000년= 창동·오동동의 어려움이 닥친 시기였다. 당시 창동·오동동 거리는 업종의 전환이 빨랐다. 창동 거리를 꽉 채웠던 고급스런 옷가게들은 김밥집으로, 어묵집으로 바뀌어 갔다. 경제상황이 나빠진 것도 있지만 이곳은 예전의 거리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상황에서 비싼 가게를 붙들고 있을 수만은 없었고, 장사를 털고 나와야만 했다. 빈 가게도 눈에 띄었고, 서민들의 호주머니 사정에 맞는 상권으로 바뀌어 갔다. 이때부터 거리에 사람들이 없는 게 눈에 확연히 드러났다.

    #1999~1990년= 창동·오동동이 시련의 시간을 맞이할 예고기간이지 않나 싶다. 초창기 때는 그나마 사람들이 붐볐다는 느낌이다. 시내를 찾아 한잔하는 사람들도 꽤 있은 걸로 생각된다. 후반기쯤 마산에 있던 기관들이 창원으로 옮겨간 이후의 경제적 타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창동의 중심이었던 마산 시민극장이 문을 닫고, 왁자지껄한 거리의 모습은 어느 날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때가 90년대 후반쯤으로 생각된다.

    #1980년대 초반= 그땐 주말이면 창동 입구에 들어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사람들 무리에 휩쓸려 시민극장 앞을 지나 코아 앞 사거리, 오동동까지 사람 물결에 떠밀려 다녔다. 연말이면 거리에 레코드 가게나 인근 상가에서 나오는 캐럴송 등 음악들은 창동·오동동의 분위기를 배가시켰다. 다방은 붐볐다. DJ들도 여기 뛰고 저기 뛰고 그렇게 경제가 돌아갔다. 한마디로 창동·오동동의 영광이었다.

    #그리고 현재= 아직 옛 영광은 아니지만 창동·오동동의 거리를 변화시키려는 창원시의 노력은 확연하다. 수년 전부터 죽어 가는 골목길에 창동예술촌, 부림창작공예촌, 문화광장, 상상길 등을 만들고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기를 불어넣고 있다. 시는 유동인구가 예전보다 2배 늘었고, 월매출액도 45% 증가했다고 한다. 어쨌든 참 기쁜 일이다.

    “나 다시 돌아갈래!”

    영화 박하사탕의 되돌리고 싶은 인생처럼, 여기 마산 창동·오동동도 수많은 변화 속에 북적북적·왁자지껄한 옛 영광을 되찾았으면 한다.

    전강준 (부국장대우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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