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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4월 30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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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기자 25시] 49기 박기원 (1) 일신상의 사유

  • 기사입력 : 2017-03-20 18:2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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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작하면서: 경남신문 신입기자들이 겪은 좌충우돌 수습과정을 솔직하고 재미있게 중계하는 '수습기자 25시'를 시작합니다. '수습기자 25시'의 주인공들은 지난 2월 1일, 경남신문 49기로 입사한 수습 트리오, 박기원·조규홍·이한얼 기자입니다. 이 열혈 청춘들의 생생하고도 달콤쌉사름한 편집국 생존기를?독자 여러분께 전합니다.>

     
     
    '짓다'라는 단어는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적인 것들과 호응한다. 밥을 짓다. 글을 짓다. 집을 짓다. 심지어 옷도 짓는다는 표현을 쓴다. 우리말 '짓다'는 사람들의 의식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나는 집을 짓는 것에 매력을 느꼈고 6년 전 건설회사에 입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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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 집은 아니지만 5년 동안 집을 몇 채 지었다. 서툴지만 천천히 업무를 배워갔고, 권태가 올 만하면 새로운 형태의 집을 또 지었다. 그중 가장 매력 있었던 집은 한옥이었다. 성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 아닌, 보존가치가 있는 문화재가 아닌, 사람 사는 한옥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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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수, 석공, 와공, 미장공. 집을 짓기 위해 많은 사람을 만났다. 성격도 제각각, 하는 일도 제각각이지만 그들의 손은 한결같이 거칠었고 마음은 넉넉했다. 사포처럼 거친 그들의 손과 고사리 같은 내 손이 만나는 순간 앞으로 있을 갈등이 눈에 선했다. 수많은 끌질과 대패질을 통해 단련된 그들과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원 간의 신경전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낮에는 고성을 주고받았고, 저녁에는 술잔을 주고받았다. 다투면서 정이 든다는 말을 이들을 통해 깨달았다. 손은 거칠고 말투는 무뚝뚝했지만, 마음만은 따듯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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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하루가 힘들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집은 올라갔다. 완성된 집을 두고 발주처든 시공사든 목수든 석공이든 다 자기가 지은 집이라고 말했다. 일의 경중과 이해관계의 다소가 있겠지만 어쨌든 모두의 손을 거쳐 지은 집이 맞다. 남의 집이었지만 제집처럼 생각하며 집을 짓는 사람들에게 인간미를 느꼈다. 잡초 무성한 벌판에서 시작해 느릿느릿 집이 올라가는 과정은 경이롭고 아름다웠다. 나는 집을 짓는 일에 기쁨을 느꼈다. 결과물이 아니라 왁자지껄한 그 과정이 나는 좋았다. 좀 더 깊이 경험하고 싶었고 누구보다도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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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오히려 깊이 경험하고 싶었던 욕심이 되레 사직서를 제출하게 된 계기가 됐다. 어떤 계기라고 확신하지 못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집 짓는 것의 민낯을 봤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건물을 짓는 사람들의 민얼굴일 것이다. 철이 들어가는 서른 즈음의 청년에게도 감당할 수 없는 어떤 무게감이었다. 그 민얼굴보다 나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이해당사자로써 목소리 한번 내지 못한 나 자신이었다. 바꿔보고 싶었다. 출퇴근길 시끄럽게 귓전을 때리는 기자들의 라디오 소리에는 뭔가 바꾸려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집을 짓는 사람은 나였듯이 천천히 세상을 바꾸고 있는 이들은 기자들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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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직이라고 써야 하나, 이직이라고 써야 하나. 상사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처음 접해보는 사직서 사유에 이리저리 갈등하다 일신상의 사유라고 적었다. 맞다. 신상의 변화가 있는 것이 맞다. 어떤 계기가 작용했는지 모르지만 마음속에서 기자라는 직업이 떠오른 건 분명 일신상의 사유다.

     
    사직서를 출력하고 인감도장으로 힘껏 날인했다. 외투 안주머니에서 사직서는 서른 번 넘게 나왔다가 들어갔다. 수줍음이 가득 담겨있는 연애편지처럼 사직서는 내 품과 회사의 품 중간에서 방황했다. 사직서를 제출하지 못해 꺼냈다 넣기를 반복한다는 인터넷 속 풍문은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한 달여를 방황한 끝에 사직서는 본사로 보내졌다. 5년여 만에 나는 대리에서 취준생이라는 새로운 계급을 받아들었다.
     
    언론사 시험을 다들 고시라고 불렀다. 하나의 기관이 관장하는 시험이 아니었음에도 고시라고 불렀다. 문은 좁고 들어가려는 사람은 많다고 해서 그렇단다. 그 많은 사람 중의 하나가 될 생각을 하니 시작부터 두려웠다.
     
    K 아카데미, 진흥재단, H 아카데미. 다닐 수 있는 곳은 다 다녔다. 기자가 하는 모든 것을 익힌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공부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 많은 사람의 대부분은 기자가 됐다. 나만 남았다. 내게 남은 건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쌓인 이력서 35개뿐이었다. 7번의 면접을 보는 내내 나이에 대한 질문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박기원 씨는 나이가 왜 그렇게 많은가? 나이 많아서 기자 할 수 있겠나? 기혼인가?" 여태까지 나는 나이가 많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다면 '일신상의 사유'를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경남신문 면접에도 당당하게 들어갔다. 어김없이 나이에 대한 질문이 들어왔고 어이없이 나이에 대한 답을 내뱉었다. "저는 우리나라에 만 나이가 도입됐으면 좋겠습니다." 면접관께서는 "박기원씨, 다른 데 가서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얘기하세요." 끝이었다. 한 문장이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다른 데 가서는… 다른 데 가서는…'
     
    2017년 1월 13일 합격통보를 받았다. 49기 수습 기자다. 기자가 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왔다. 지면에 실린 내 이름을 보며 새로운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배워나가기로 다짐했다. 사람들이 '수습기자 박기원 씨의 나이 많음'을 얘기한다면 나는 대답할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박기원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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