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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주 기자의 영화 읽기- 나는 부정한다(감독 믹 잭슨)

“홀로코스트 진위를 증명하라” 거짓 맞선 진실

  • 기사입력 : 2017-05-08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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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짜뉴스가 온 나라를 휘젓는 요즘, 여론선동의 무서움과 진실규명의 무거움을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가 관객을 찾고 있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는 영국에서 4년 동안 실제로 벌어진 ‘홀로코스트’ 명예훼손 민사소송을 모티브로 한다. ‘홀로코스트’는 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을 대량으로 태워 죽이거나 대학살하는 행위를 총칭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을 뜻하는 단어로 흔히 쓰인다. 600만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희생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나치를 추종하는 일부 세력은 이 사건을 허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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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시종일관 홀로코스트의 존재를 부정하는 세력 가운데 한 명인 데이비드 어빙(티머시 스폴)과 유대인 역사학자인 데보라 립스타트(레이첼 와이즈)의 대결로 끌고 간다. 1994년 미국의 애틀랜타에서 열린 립스타트 강연에 홀로코스트 부인론자 데이비드 어빙이 찾아오면서 극은 시작된다. 어빙은 평소 자신을 비판해온 그녀를 향해 홀로코스트가 실존한다면 증거를 갖고 오라며 도리어 도발을 감행한다. 이러한 소동으로 세간의 시선을 모은 어빙은 자신의 연구 업적에 대한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언론과 대중을 향해 여론을 선동한다. 결국 어빙은 립스타트가 쓴 저서 ‘홀로코스트 부인하기’에서 자신을 ‘나치 옹호자이자 히틀러 숭배자, 사실을 왜곡해 홀로코스트 학살이 실재하지 않았다고 뒷받침하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라고 써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소송을 건다.

    명예훼손죄로 고소된 립스타트는 1996년 영국 런던에서 어빙과 긴긴 법적 공방을 시작한다. 일부에서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 적당히 타협하라고 조언하기도 하지만 립스타트는 침묵으로 사실을 규명할 수 없다며 정면승부에 나선다.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영국에서 진행되는 소송에서 립스타트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면 ‘홀로코스트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립스타트는 역사가의 소명의식으로 지루한 싸움을 이어간다. 감정에 치우친 그녀를 도와줄 법률계 드림팀이 꾸려진다. 유능한 변호사 앤서니 줄리어스(앤드류 스콧)와 노련한 베테랑 변호사 리처드 램프턴(톰 윌킨스)을 주축으로 학술적 자문을 도와줄 역사학자가 합류한 팀은 방대한 양의 서적과 자료를 훑어가며 어빙에 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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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간 사회적으로 옳지 않은 일을 규명하는 법정영화는 종종 있어 왔다. ‘변호인’ ‘재심’ 등이 감정에 호소하며 억울함을 달래줬다면 이 영화는 이성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증거를 찾기 위해 잔인한 질문을 쏟아내거나, 법정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당시 목격자들을 법정에 세우지 않겠다는 변호인단은 냉혈한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나치의 조직적 활동이 없었다거나 가스실 처형시설은 존재하지 않았다와 같은 어빙의 얼토당토않은 주장들을 법정에서 조목조목 반박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통쾌함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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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직한 스토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배우들이 중량감 있는 연기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화려한 액션이나 연출은 없지만 생생하게 살린 캐릭터와 시나리오, 메시지가 영화를 풍성하게 만든다. 감정적으로 치닫는 립스타트와 이성적으로 압도하는 변호인단의 내적 갈등, 이를 팀워크로 극복하는 전개도 관전 포인트다.

    1996년 9월에 시작한 공방은 2000년 1월까지 총 32번의 공판으로 이어진다. 양측은 예상하지 못한 주장과 반론을 통해 핑퐁게임을 하며 극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재판장의 단독 판결로 결정되는 이 사건을 맡은 찰스 그레이 판사는 334쪽에 달하는 판결문을 쓰지만 마지막 장은 공란으로 비우고 마지막 공판에 나선다. 판사는 “두꺼운 분량의 판결문이 향후 어빙의 주장이 무분별하게 퍼지는 것을 막아주는 거대한 방어막이 될 것”이라는 판결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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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문화는 대중이 접하는 시기에 따라 유의미해진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영화는 현재를 사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어빙은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이 보상금을 얻어내려고 만든 괴담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극우세력이 위안부 할머니에게 하는 말과 매우 유사하다. 이들은 침묵이 아닌 부정으로 사실을 규명한다. 잘못된 일을 침묵으로 일관하기보다 부정한 일에 대해 부정할 줄 아는 시대상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거짓을 논리적으로 반박해 더 이상 역사 속에 진실로 위장할 수 없게 한 그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정민주 기자 jo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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