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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시대 (4) 농촌서 텃밭 일구며 살아가는 채동수씨

[창간기획] 100세 시대, 은퇴자에게 길을 묻다
귀농 5년차 ‘텃밭지기’… 욕심 내려놓자 행복 찾아왔다

  • 기사입력 : 2018-04-09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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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은퇴’ 두 글자를 입력해봤다.

    연관 검색어로는 ‘은퇴 후 40년 살아가는 법’, ‘은퇴 후 살기 좋은 곳’, ‘은퇴 후 생활비’, ‘은퇴 후 직업’과 같은 단어가 잇달아 뜬다. 날마다 팍팍하기만 한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평균수명이 길어져 ‘시간은 남고, 할 일은 크게 없는’ 은퇴 후 미래의 삶까지도 동시에 고민해야 하는 현실이 고스란히 담긴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우리나라 국민들은 은퇴 후 삶을 막막해하지만 은퇴 준비는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5일 국내 한 보험사가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전국 성인남녀(25~74세) 195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인의 은퇴준비지수는 54.5점에 그쳤다. 설문 4개 항목 중 그나마 재무, 건강, 인간관계 3개 항목에서는 60점 안팎(59~67점)의 점수가 매겨졌지만, 여가나 자기계발 등을 묻는 ‘활동’ 영역에서는 다른 영역보다 한참 미치지 못하는 44.2점에 그쳤다. 은퇴 이후를 늘 고민하면서도 은퇴 이후 어떻게 의미 있고, 활기찬 삶을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길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굳이 설문조사 결과를 들이밀지 않더라도 우리네 곁 필부필부(匹夫匹婦) 누구라도 이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창원시내에서 자가용으로 20여분 거리인 동읍 화양리 한 텃밭에서 지난 5일 만난 채동수(64)씨.

    “아지매요, 일로 와서 한잔 자시고 일하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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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 5년차 ‘전업텃밭지기’ 채동수씨가 창원시 의창구 동읍에 있는 자신의 텃밭을 가꾸고 있다./성승건 기자/


    오후 2시께 그가 문자메시지로 알려준 곳에 도착하자 우렁찬 목소리가 들린다. 텃밭 초입엔 서너 사람이 넉넉히 누워 쉴 만한 사각형의 정자 한 채와 각종 농기구 등을 보관하는 조립식 창고가 보인다. 그 앞엔 잘 골라 두둑하게 쌓은 이랑과 고랑, 그 위로는 여러 종류의 나무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정강이 높이의 장화를 신고 밭일을 하던 채씨는 때마침 느긋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인근 밭에서 갓 자란 쑥을 뜯고 있는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안부를 전하며 음료수 한잔 건네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 서넛 붙잡아 텃밭 정자에서 막걸리 한잔씩 나눠 마시고 담배 한 대 물면 세상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는 채씨. 그의 느긋한 표정에는 여유로움이, 직접 담근 말벌주 한잔 권하기 위해 술을 꺼내러 가는 잰걸음엔 행복이 묻어나 있었다.

    채씨는 지난 1982년부터 32년간 창원의 한 자동차부품회사에서 정년을 채우고 2014년 만 60세에 정년퇴직했다. 올해로 은퇴 5년차. 200평 남짓 텃밭을 가꾸고 있는 ‘전업텃밭지기’ 5년차이기도 하다.

    고성이 고향인 채씨는 1980년대 초반부터 줄곧 창원에서 살며 한평생 치열하게 일했다. 어렸을 적 학교 가기 전 퇴비를 밭에 나르고 등교를 하기 일쑤였던 그는 농사가 얼마나 고된 일인지 잘 알았다. 그래서 “농사는 절대 짓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하고 도시로 떠나 직장생활을 이어오다 지금의 아내와 결혼해 외벌이를 하며 어렵사리 자그마한 전세주택을 얻어 살림을 시작했다. 이후 10평짜리 아파트로 옮기고, 임대주택으로도 이사하며 몇 년을 살다 결혼 10년 즈음에는 집 한 채 장만했다. 채씨 부부에게도 내집마련이 인생에서 가장 큰 꿈인 시절이었다.

    여느 필부(匹夫)처럼 채씨도 은퇴 이후 삶을 늘 고민하면서 직장생활을 했는데, 역설적이게도 은퇴 후 남들보다 더 잘 살아야겠다는 일종의 욕심을 내려놓자 그의 말을 빌려 ‘남들한테 신세 안 지고 친구들 만나 술 한잔 살 정도’로 여유롭게 지금 살고 있다. 은퇴하면 갈 곳 없는 게 가장 힘든데, 매일 올 수 있는 내 공간이 생긴 건 덤이란다.

    “그저 하루하루 치열하게 일하고 꼬박꼬박 월급 받아서 아내에게 가져다 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산 너머 마을에 먼저 집을 사서 들어와 살던 회사 동료가 ‘친구야, 정년퇴직하면 집이나 지어서 텃밭 몇 평 일구며 주변에 나눠주고 막걸리나 한잔씩 마시면서 살자’고 하더군요. 솔깃했죠.”

    어렸을 적 그렇게 싫었던 농사였다. 제2의 업으로 삼을 자신은 없었지만, 밟고 자란 흙은 늘 그리웠기에 분수껏 지어 흙에서 나온 것들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며 살아야겠다고 그는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짐했다. 청춘을 바친 곳에서의 앞으로 일할 시간이 10년 남았을 때였다.

    그때부터 채씨는 본격적으로 은퇴 준비를 시작했다. 친구 따라 시골로 들어와 지금 텃밭을 일군 땅을 샀다. 술 한잔 할 수 있는 용돈을 쪼개고 쪼개 주말이면 각종 나무 한 그루씩을 사서 심는 게 즐거움이 됐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시작한 편이지만 아내의 헌신과 오랜 친구의 조언이 은퇴준비에 큰 도움이 됐단다. 특히 채씨는 “사람 만나는 걸 워낙 좋아해서 회사 다니고 마라톤 동호회 활동하며 술도 많이 마시러 다녔는데, 다행히도 아내가 월급을 알뜰히 모아 조금씩 불려가면서 이 땅도 장만할 수 있었다”며 “연금과 퇴직 당시 받은 주식이 일부 있어 넉넉지는 않지만 노후자금으로는 부족하지 않게 준비는 되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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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괭이로 텃밭을 가꾸고 있는 채씨.


    채씨를 채근해 텃밭 구석구석을 돌아보기로 했다. 아기가 나날이 자라듯 나무가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걸 보는 재미가 있다며 그간 심고 가꾼 것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알려준다. 아로니아, 블루베리, 대봉감, 구지뽕, 대추, 매실, 사과 나무와 허리 높이의 영산홍, 헛개나무, 지난해 울릉도 여행 갔다 사와 심은 마가목이 텃밭에 자리잡았다. 이랑에는 손톱만 한 하수오 새싹이 올라오고 있고, 한쪽에는 진돗개 한 마리가 바닥에 배를 붙이고 느긋한 낮잠을 자고 있다. 그는 “너무 많이 하면 고되고 재미도 없어서 그저 철마다 우리 식구 먹을 만큼 실컷 먹고 남는 건 옛 직장 동료들에게도 조금씩 나눠 줄 정도다”며 “1년 내내 바쁜 거 없이 유유자적한데 요즘은 은퇴를 준비하는 후배들이 찾아오면 막걸리 한잔하면서 농사 가르쳐 주는 재미가 가장 크다”고 웃음지었다.

    남은 인생 그는 어떻게 살고 싶을까? 채씨는 “앞으로 80세까지는 건강하게 활동하고, 좋은 나무 있으면 그때그때 1~2그루씩 정리하고 심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다”며 “무엇보다 땅에서 난 자그마한 알맹이 하나라도 주위에 나눠주는 기쁨도 지금처럼 누리고 싶다”고 말했다.

    말벌주 한잔을 따라주며 그는 예비 은퇴자들에게 욕심을 버리라는 평범하지만 쉽지 않은 조언도 함께 건넸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또 생기기 마련입니다. 주머니에 갖고 있는 돈의 많고 적음보다는 얼마를 가지고 있든 ‘아, 나는 부자다’ 마음먹어야 은퇴 후 삶의 질도 높아집니다. 은퇴하고 나서 무엇을 할지 몰라 생기는 막연한 두려움은 무엇을 하고 싶을지 40대 때부터 천천히 생각해보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마음먹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자신이 있을 만큼 젊었을 적부터 건강 관리를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도 꼭 전하고 싶습니다.”

    도영진 기자 doror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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