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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학 담론을 경계한다- 이성모(문학평론가)

  • 기사입력 : 2018-05-2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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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남북의 상황은 살얼음을 딛는 듯,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이 급박하다. 열강의 이해와 맞물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정황에 세계사 평화 담론의 진원지로서 한반도라는 이상주의가 약동하고 있다. 그에 편승하여 이상화된 통일문학 담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당대 민족의 현실과 괴리된 자기도취적 낭만적 감흥, 혹은 ‘우리 민족은 하나다’라는 공소한 추상적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 ‘하나’가 아닌데 ‘하나임’을 앞세우는 환상적인 공동선. 게다가 이해, 사랑, 민족애라는 추상적인 단어로 의장된 통일문학이란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작금의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역설적으로 통일문학이 되어야 할 것보다 통일문학으로 되어서는 안 될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벌써’ 통일문학을 말하기에 앞서 ‘아직도’ 분단문학을 말해야 하는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진정한 통일문학은 ‘통일문학’이라는 말에 대한 투쟁이어야 한다. 통일문학이라는 담론에 지배되거나 종속되면 그것이 오히려 진정한 통일문학의 벽이 될 것이다. 민족적 이질화라는 벽 앞에서, 벽이 있기 때문에 나아가야 할 것이 있다는 절망적인 인식에서 출발되어야 한다. 최소한 그것은 분단의 벽을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이다. 통일문학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자리한 끝자락은 바로 그 벽, 분단의 벽을 통해서이다.

    통일문학의 처음과 끝은 역시 인간의 문제이다. 통일은 남과 북의 산하가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남과 북의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로 보는 것이 허용되고, 한편으로는 하나로 될 수 없는 절망이 만나는 자리. 동일화를 향한 좌절을 선언하는 처절한 인식에서 통일문학은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 모든 것은 부재, 그 부재가 있기 때문에 태어난 갈망이어야 한다.



    통일문학이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임을 아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통일이 민족의 구원이며 모든 민족적 절망을 거척하는 생명성의 시원이라고 하더라도 문학은 그러한 이상주의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서 자리 잡아야 한다.

    광복 직후, 너나 할 것 없이 발표된 광복시를 읽을 때 느끼는 반성과 성찰이란 다름이 아니다. 섬광과도 같은 격정의 순간이 위대한 광복시라고 생각했을 뿐, 되찾은 산하가 벅찬 감동으로 휘몰아쳐 앞다투어 그것을 노래하는 것이 진정한 광복시이며, 일제에 대한 저주와 타매가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창조적 역사를 향한 변화를 읽어 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자의건 타의건 이데올로기의 포로, 혹은 몽상적인 미래주의자로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역사 앞에 자신이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모두를 변화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조차 할 수 없었던 이데올로기의 거대한 장벽. 변화를 변혁으로 이어나갈 의지조차 차단된 채, 여하간의 역사적 실존적 선택이 실종된 자리, 게다가 분단으로 함몰된 늪에 통일문학은 독재에 길항하는 저항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 왔다.

    따라서 통일문학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어떻게’라는 질문은 늘 혼돈을 배태하고 있는 말이다. 더욱이 남북 문학의 이질화, 그 혼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남한의 문학가나 북한의 문학가나 할 것 없이 통일문학에 직면하여 가져야 할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통일은 청산해야 할 역사와 새롭게 창조해야 할 역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세계의 파멸은 정치 제도에서가 아니라, 영혼의 비열함 속에서 나타날 것”(보들레르)인 까닭에 인간 본연의 영혼을 정화하는 문학의 힘. 그 본질에서부터 통일문학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이성모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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