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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19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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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 가야문화 (5) 일본 속 가야 유적지

스에무라 유적지서 ‘도래 1세대 사용 추정’ 가마터 발견
원형 등 그대로 복원 ‘스에무라 카마이토군’
고대 한반도서 전해진 스에키 가마터 발굴

  • 기사입력 : 2018-10-3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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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조상들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일본지역에 진출해 정치·문화에 큰 영향을 줬다. 특히 일본열도 문화를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4세기 무렵이다.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쟁탈전을 시작한 4세기부터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까지 4개 나라 모두 왜와 긴밀하게 교류했다. 당시 왜는 초기 국가 형성 단계로, 국호(일본)도 국경도 없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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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사카이시에서 원형 그대로 복원한 가야 도래인 가마터.

    2세기 말 일본열도에는 30여 개의 소국이 야마타이국의 히미코(卑彌呼)를 맹주로 소국 연합체를 형성했다. 당시 왜보다 기술이 발달한 한반도 나라들은 선진문화를 전수했다. 이후 야마토 정권이 성립되고 아스카시대를 여는 등 일본문화의 뿌리가 상당수 한반도에서 시작됐거나 관련이 깊다는 것은 이제 한일 양국 학계의 정설로 자리잡았다.

    고구려인들의 고분벽화가 일본의 다카마쓰 고분에서 발견되고 백제의 왕인이 한문과 유교의 충효사상을 보급시킨 흔적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신라인들은 불교를, 가야인들은 토기 제작기술과 철기, 기마술을 전파했다. 고대 한반도 국가 가운데 백제와 가야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 정치적으로 연결돼 친선관계를 오래 지속했기 때문이다. 특히 지리적으로 인접한 가야와 왜는 활발한 교역을 했다. 두 나라는 기술을 전해주고 군사력을 지원받는 상생을 도모했다. 국력이 급격히 쇠락한 가야의 주민들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삶의 터전을 왜로 옮겨갔다. 일본 곳곳에는 가야로부터 넘어온 도래인들이 남긴 흔적이 남아 있다.

    ◆가야계 지명= 일본 규슈에서 오사카로 가려면 세토 내해(세토나이카이)를 통과해야 한다. 세토 내해에 접해 있는 오카야마의 옛 이름은 ‘기비’인데 5세기 전후에는 ‘가야’라고 불렸다. 기비에는 기노성이 있는데 성의 낮은 언덕에는 무덤이 자리하고 있고 그 뒤로 산성이 배치돼 있다. 이 구조는 아라가야, 대가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한반도 도래인 집단이 외부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향의 군사 방어시설을 축조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특히 가야계 집단으로 추정되는 이유로 지명을 들 수 있다. 하토리 마을은 기비 가야국의 정치 중심지로 가야촌으로 불렸다. 여기에는 ‘나가라’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아나가라(아라가야)’를 줄인 말이라고 전해진다.

    일본에는 고대 도래인들이 쓰던 말이 유래돼 지명으로 남은 곳도 많은데 대표적인 곳이 ‘오이소(大磯)’이다. 오이소는 고구려의 왕족 약광(若光)이 일본으로 건너가 도착한 곳으로 가나가와현 고자군 사가미초에 있는 작은 포 (浦)의 이름이다. 재밌는 것은 오이소가 ‘어서 오세요’의 경상도 방언이라는 점이다. 당시 이미 정착 중이던 가야계 도래인들이 새로 건너온 고구려인들을 환영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일본인을 이해하려면 신사(神社)를 가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일본인들은 인생의 중요한 매듭마다 신사를 참배한다. 이처럼 신사문화는 그들의 삶에 깊게 스며들어 있다. 신사에서도 가야계 지명이 남은 곳들이 있다. 바다를 건너온 가야인들도 자신의 조상신을 기리기 위해 신사를 만들었는데, 그 이름이 가라, 카라, 아라, 아야로 가야의 흔적이 남은 신사가 지금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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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마터 안내표지판.

    ◆가야계 성씨·단어= 가야와 관련된 말은 일본 전역으로 퍼져 있다. 가아(可也), 가열 (可悅), 하양(河陽), 문옥 (蚊屋), 녹곡(鹿谷), 하사 (賀舍), 하야(賀野), 모(茅), 하야(賀夜), 하양(賀陽), 가야(加夜), 고양(高陽), 반(返) 등 일본에서 쓰이는 단어는 한자가 다 다르지만 ‘가야’로 읽었다. 쓰시마섬을 비롯해 규슈 일대, 기나이, 간토 등에 광범위하게 분포돼 있는데, 이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가야계 도래인들이 더 일찍 정착했다는 근거가 된다.

    일본인들의 성씨 가운데 한국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교토를 처음 개척해 일본 수도를 나라에서 교토로 천도하는 데 애쓴 ‘하타(秦)’씨는 신라계 도래인으로 바다를 건너왔다는 뜻에서 바다가 하타로 바뀌었고, 가야계 도래인 ‘아야(漢)’씨 역시 가야에서 전이됐다. 속일본기(772년)에 따르면 나라 말기 당시 중심지였던 다케치군 인구의 80% 이상이 아야 씨와 하타 씨라고 쓰여 있는데, 야마토 정권의 수도 인구 대부분이 도래인이거나 도래인의 후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일본의 최고신인 ‘오오구니 누시노 미코토’의 원래 이름은 오오아나 누시노 미코토 (大穴主命)로, 여기서 ‘아나(穴)’는 가야국 가운데 하나인 아나(阿那)국을 말한다. 가야와 왜는 유물, 지명, 성씨 등을 근거로 볼 때 문헌자료에 나타나는 것보다 훨씬 더 빈번하고 밀착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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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이소역.

    ◆오사카에 남은 가야 가마터= 가야인들은 규슈를 거쳐 오사카에 정착한다. 오사카에서 아스카로 넘어가는 산맥 근처에 ‘가까운아스카’가 있는데 현재 오사카의 가와치 지역이다.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책에서 ‘그 동네 풍경을 보면 일본 풍경이 아니라 우리나라 동네 사진을 찍어둔 것 같다’고 말하며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라고 했다. 그는 오사카 남부인 이즈미에서 발견된 가마가 가야 이주민들이 남긴 흔적이라고 말했는데, 일본학자들도 가야토기와 크기, 형태가 같은 스에키를 굽던 가마라고 밝혔다.

    오사카 부근에 있는 사카이시(市)에는 ‘스에무라(陶村) 카마이토군’을 복원해 놓았다. 스에무라 카마이토군은 센보쿠 지역을 중심으로 고대 한반도에서 전래된 스에키 토기를 생산했던 가마터가 대거 발견된 곳이다. 표지판에 도가 제61호라고 쓰여있는 이 가마는 아나가마(穴窯)로 시에서 원형, 크기를 공원에 그대로 복원해 시민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가마는 10m 이상의 길이로 꽤 긴데, 아래쪽에 입구가 있고 꼭대기 부분은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조를 하고 있다. 마이니치신문 1991년 9월 12일자에 ‘최고의 스에키 가마터, 사카이시에서 확인’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났는데, ‘도래 1세대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을 실었다. 스에무라 유적지에는 한 가마터에서 주거지가 5개 발견됐는데 4인 가족을 기준으로 한 가마터당 20명이 토기 생산을 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유적지 일대에 가마가 1000개 이상 발견됐다고 하니 2만명이 넘는 도래인들이 토기를 만들며 새로운 곳에서 정착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공원 구석에 자리한 데다 안내소가 문을 닫은 탓인지 주민들, 한국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 아쉬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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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카츠아스카 박물관.

    ◆일본 고대사 연구는 어떻게= 가야사는 문헌이 적고 다른 삼국에 비해 고고학적 발굴이 늦어 연구가 미진하다. 일부 사학자들은 일본이 가야에 대한 연구를 더 많이 했다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고대사를 어떻게 연구하고 있을까.

    아스카문화를 연구하는 치카츠아스카(近つ飛鳥·가까운아스카) 박물관을 찾았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독창적인 건물로도 유명한 이곳은 1994년 오사카부립박물관으로 개관했다. 닌토쿠릉의 웅장한 스케일을 형상화한 박물관에는 카와치와 이즈미의 고분군에 대한 설명과 출토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는 금동말안장, 가야계갑주, 금동신발, 스에키 등의 가야 유물들도 만나볼 수 있다.

    역사박물관의 사회적 인식에 대해 묻자 모리모토 토오루 부관장은 “일본에서는 박물관장이 대체로 학계의 권위자가 임명되고 지위도 매우 높다”며 “오오바오사모가 초대 박물관장을 맡은 이유도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목간 연구자였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지난 25~26일 창원에서 열린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 국제학술대회에도 참석한 모리모토 토오루 부관장은 가야사 복원이 국책사업으로 선정돼 관심이 높다는 점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은 고대사 연구에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최근 가야사 열풍이 불고 있는 한국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일본에서는 유적 발굴 조사할 때 여러 분야 연구자들이 함께 작업하고 있다. 특히 매년 일정한 숫자를 정해놓고 유적 현황조사를 하는데, 이때 주민들이 상황을 확인할 수 있도록 공청회를 열거나 정보 알림 서비스를 제공한다. 한국에서도 여러 분야 연구자들이 협업해 체계적으로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민주 기자 joo@knnews.co.kr

    ※ 이 기사는 경남도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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