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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도토리를 줍다- 허숙영(수필가)

  • 기사입력 : 2021-11-04 20: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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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거충이 농사꾼이 된 지 두 해째다. 고구마를 캐고 국화차를 만들고 갈무리해둔 호박으로 오가리도 만든다. 새벽부터 부산을 떨지만 손에 익숙지 않아 하루해가 짧다. 시골에선 표 나지 않는 허드렛일도 일손이 많이 잡힌다. 그래서 체력 단련이나 취미생활은 신새벽에 할 수밖에 없다.

    남편과 나는 새벽 산책을 한다. 체력도 기르고 소소한 의견도 나누는 오붓한 시간이다. 동트기도 전 고샅을 빠져나와 이슬 젖은 길 대신 인적 뜸한 큰길로 나선다. 아주 가끔 차가 스쳐 지나간다. 세상은 온통 뿌연 안개 속이다. 머잖아 온전하게 돌려놓을 풍경이지만 자연 위에 덧칠한 것처럼 답답하다. 전선줄 사이로 희미하게 반원을 그린 달은 오선지에 온음표 하나 걸쳐 놓고 느긋하다.

    나지막한 산언덕을 넘어 삼십여 분 걷노라면 산 아래 낮게 엎드린 외딴집이 있다. 공동묘지와 연못을 세 개나 거느린 긴 골짜기라 한 시간여를 걸어야 인가가 나온다. 웬만한 담력이 아니고는 힘들 텐데 아주머니 혼자 득도한 듯 몇 년째 그 집을 지키고 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길 건너 연못을 낚시터로 만들어 삶의 터전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민물고기를 풀어놓고 터를 다졌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바깥주인이 갑자기 세상을 뜨는 바람에 오도 가도 못 한 채 갇혀 버린 것이다.

    앞마당의 코스모스도 대궁이 말라간다. 낚시꾼 발길 뜸한 넓은 연못은 어느새 물풀들로 가득 차고 가장자리 의자들은 안개 속에 사람처럼 웅크리고 앉았다. 낮은 처마에 매달린 찌그러진 맥주깡통이 풍경인 듯 매달려 옛날 일을 전할 뿐이다.

    길 가장자리는 떨어진 밤송이가 차바퀴에 뭉개져 온통 가시밭이다. 신발 끝으로 밤송이를 툭툭 차서 치우는데 우두둑 밟히는 것이 있다. 눈을 땅 가까이 갖다 대고 보니 도토리다. 각양각색 도토리가 흩뿌린 듯 지천이다. 도토리묵을 해먹던 옛일이 생각나 무작정 도토리와 알밤을 주워든다. 희붐하게 동살이 트기 시작하면 도토리 줍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때부터 두 눈을 부릅뜨고 바닥만 응시한다. 걸으며 체력을 다져 보자는 본래 목적은 잊은 채 양 호주머니가 불룩해져 엉거주춤 걷는 모습은 가관이다. 매일 도토리와 알밤을 줍는 재미에 길바닥만 보며 지낸 날이 달포다.

    이제는 산책을 나온 것인지 도토리를 주우러 나온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왠지 널려 있는 것은 다 주워야만 될 것 같은 의무감까지 느낀다.

    도토리를 줍다 목이 아파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다가 탄성을 내질렀다. 도로가의 우람한 나무 성긴 가지 사이로 비치는 하늘은 걸작이었다. 잡티 하나 없는 연분홍 꽃구름이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빈가지에 꽃을 활짝 피워놓았다. 막 솟아오르는 햇살이 반대쪽 하늘까지 반사된 것이다.

    살다 보면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다른 일에 휘둘릴 때도 있다. 하늘을 한 번씩 올려다볼 여유가 있었더라면 진즉 깨달았을 일이다. 무심코 놓쳐버린 소중한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우리가 지나쳐온 길섶의 풍경에도 눈길을 주자고 작정하고 보니 연보라색 구절초가 손을 흔들며 반기고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새파랗게 질린 청록의 나팔꽃도 흐드러졌다. 나무도 도토리를 아낌없이 떨구고 있다. 가을걷이 끝난 밭처럼 마음 밭도 말끔히 비워야 할 때다.

    허숙영(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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