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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사는 날까지는- 이홍식(수필가)

  • 기사입력 : 2023-03-06 19:5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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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의 무상함과 빠름을 비유하는 말 가운데 ‘인생 시간은 한 개의 두루마리 화장지와 같다’는 말이 있다. 처음에는 천천히 돌아가다 갈수록 도는 속도가 빨라진다. 그러다 마지막 휴지가 풀리고 나면 딱딱한 휴지 심 하나만 덩그러니 남는다. 마치 허물 벗은 벌레의 흔적 같다. 추수 끝난 들판에 버려진 허수아비처럼 쓸쓸하다. 휴지가 돌아가는 모습은 사람이 나이 들며 느끼는 세월의 빠름과 어쩌면 이리도 같을까 싶다. 생각해보면 시간이란 우리가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기다릴 때는 그렇게도 가지 않던 시간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달아나듯 훌쩍 가버린다. 똑같은 시간을 두고도 마음 쓰는 데 따라 이처럼 느리게도 가고 빨리 가기도 한다. 그럴 때는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이 무슨 도깨비 같다.

    세월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작년 그믐날 가까운 사람과 덕담을 나눈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해가 바뀌어 얼마 안 있으면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올 날이 바로 코앞이다. 생이 기울어갈 즈음인 나 역시 두루마리 화장지 돌아가는 소리가 제법 빠른 소리를 낸다. 남은 게 그리 많지 않음을 알리는 것 같아 마음이 서글퍼진다. 남은 화장지를 생각하면, 사는 게 몹시 허망하고 외롭다는 생각이 온몸을 휩싸고 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남은 것을 한 조각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고 살뜰하게만 쓴다면 혼자서 외로워하거나 허망해할 것도 없다. 오히려 이런 외로움이 삶의 한 토막을 값있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며 보람되게 누려야 한다. 사는 날까지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시간을 아껴 쓰는 일은 잘 사는 일과 같다. 다시 말해 잘 사는 것은 잘 죽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잘 살아야 잘 죽는다.

    ‘아흔 즈음에’를 쓴 인문학자 김열규 교수는 “나는 한 번도 시간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다만 뒷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까마득한 길 끝에서 먼지처럼 사라져가는 뒤 꼴을 먼빛으로 보았을 뿐이다.” 나 역시 시간의 뒷모습은 물론이고 시간이 가는 것도 보지 못했다. 시간은 가만있는데, 흐른 건 내 마음이었다.

    이홍식(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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