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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가을 하사마을의 풍경- 차재문(연강산업 대표이사·수필가)

  • 기사입력 : 2023-06-25 20: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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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둘레길 하동~구례 구간은 섬진강을 조망하는 길이다. 둘레길과 보조를 맞춘 섬진강 시야가 트이는 곳이면 새털구름이 강물에 사뿐히 앉았다. 강물은 무대가 되고 새털구름은 배우로 변신한다. 섬진강을 오래 바라보던 관객인 길손은 어느새 섬진강의 유순함을 닮아가는 것을 느낀다.

    작년 추석 무렵에 지리산 둘레길 19구간에 터를 잡은 구례군 마산면 하사마을 길을 걸었다. 안내표지판에는 역사가 통일신라 흥덕왕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을에는 지금도 음용되는 ‘작은등샘’ 우물이 있다. 둘레길을 걷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질문하고 무언가를 두드리고 단어 선택 하나도 길과 연관 지어야 적성이 풀린다. 우물가에서 나는 이 샘의 근원과 이름의 이유를 짐작해 보았다.

    마을은 적막했다. 지리산의 가을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도 누군가 바라보고 즐기는 사람이 있어야 빛을 발한다. 창공은 한없이 깊고 푸르러 눈이 시렸다. 담장에는 붉은 반점이 점점이 박힌 대추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눈길을 끌었다. 풍경을 놓칠세라 눈요기하고 있는데 어느새 주인 아주머니가 등 뒤로 다가와 먹을 만큼 따먹으라면서 선심을 베풀었다. 겨우 대추 몇 알 맛보았지만, 길손에게 대추를 따 먹으라는 말이 서늘해지는 가을에 맞잡은 손의 온기처럼 그렇게 따뜻했다.

    아주머니와 담소를 나누었다. 마을이 지리산 자락의 품새에 앉아 산세와 지세가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당신은 이웃마을 아가씨들이 하사마을로 시집오는 것이 로망이었다면서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너른 들녘이 있어 밥은 굶지 않았다면서 말을 이어갔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동안 아기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고 골목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본 적도 없다. 아이가 사라진 마을은 노년의 삶도 피폐하다. 인간은 후대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재산이나 글이나 문명을 남길 때마다 근원적인 첫 질문은 생명 아닌가. 아주머니도 아이가 없는 마을에 길냥이만 어슬렁거린다면서 소멸해 가는 가을보다 먼저 스러져 가는 인기척을 아쉬워했다. 한없는 적막 속에서 가을이 익어가고 있었다.

    차재문(연강산업 대표이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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