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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8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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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氣 받기- 삼성·LG·효성·GS 창업주 이야기 4부] ⑦ 구허오칠(具許五七), 구씨·허씨 동업 57년

[4부] 멈춤과 절제의 미학 GS그룹 설립과 허준구
구씨·허씨 동행 57년, 1946년 부산 조선흥업사에서 출발했다

  • 기사입력 : 2023-08-30 21: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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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인회가 부산서 조선흥업사 운영 시절
    허만정이 3남 허준구와 함께 방문해
    자금출자 제안하며 사업 참여·동업 시작
    구인회·구철회·허준구 등 ‘허·구 4인방’
    새 아이템 찾다 여성용 화장품 판매 결심


    해방이 되자마자 구인회는 좀 더 큰 도시에서 더 큰 사업을 하기 위해 진주에서 운영하던 포목점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이전하여 미군정청 1호 무역회사 조선흥업사 설립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진주에서 포목점을 함께 경영하였던 동생 구철회와 구정회를 다시 불러 부산에서 새로운 사업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허준구가 여름에는 멱을 감고 겨울에는 얼음 썰매를 타고 놀았다는 지금의 지수 하천 모습이다. 좌측 담장이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생가 담장이다. 90년 전에는 하천의 폭이 지금보다 3배 정도 더 넓었고 자연 형태였지만 지금은 마을 개발과 수리시설로 인해 그때의 모습을 느낄 수 없다. 구자경 LG그룹 2대 회장도 이 하천에서의 추억을 잊을 수 없는 가장 큰 추억이라고 하였다./최정희 문화해설사/
    허준구가 여름에는 멱을 감고 겨울에는 얼음 썰매를 타고 놀았다는 지금의 지수 하천 모습이다. 좌측 담장이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생가 담장이다. 90년 전에는 하천의 폭이 지금보다 3배 정도 더 넓었고 자연 형태였지만 지금은 마을 개발과 수리시설로 인해 그때의 모습을 느낄 수 없다. 구자경 LG그룹 2대 회장도 이 하천에서의 추억을 잊을 수 없는 가장 큰 추억이라고 하였다./최정희 문화해설사/

    # 사돈, 나 허만정이오

    국제시장 인근에 있는 조선흥업사의 1호 사업 품목은 목탄을 원료로 한 숯 사업이었다. 하지만 목탄은 1년 사계절 소모되는 것도 아니고 만드는 과정도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투자한 만큼 수익이 없었다. 구인회 스스로 목탄사업은 실패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구인회는 두 번째 사업 품목을 찾아 나섰다. 일본 농기구 수입 판매에 관심을 가졌지만 또다시 실패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씨 3형제는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였다. 해가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46년 1월 초, 구인회 장인과 6촌 관계인 허만정이 3남 허준구(구철회 맏사위)와 함께 조선흥업사 사무실에 나타났다.

    # 동업을 시작하다

    이날이 2004년 LG와 GS로 분리되기 전 57년간 동행한 허씨 구씨의 동업 시작 배경이다.

    허만정 (이하 허): 사돈, 지수 허만정이오. 부산에서 사업은 어떠하오.

    구인회(이하 구) : 시국도 어수선하고 그렇게 좋지는 않습니다.

    허 : 내가 사돈이 진주에서 포목점을 하고 청과, 어류, 운수 등 여러 가지 사업하는 것을 보았소. 사돈의 기업 경영 능력이나 인품은 잘 알고 있소. 사업을 잘할 분이오. 내 사돈을 믿고 있소. 필요한 자금을 출자할 테니 같이 사업을 한번 추진해 봅시다.

    구 : 감사합니다.

    허 : 그리고 한 가지 더. 여기 준구. 사돈의 친동생 맏사위 아니오. 준구를 사돈에게 부탁하니 일을 좀 가르쳐 주시오.

    구 : 준구야 성실하고 총명하여 제게는 더없이 좋은 인적자원이죠.

    허 : (준구를 보고) 준구야, 경영은 구씨 집안이 잘한다. 넌 절대 앞서지 말고, 나서지도 말고, 너에게 주어진 본분을 잘 하도록 해라. 처신과 몸가짐을 잘하고 돕는 일에만 충실히 하여라. 그리고 잘 배워라. 할아버지가 늘 말씀하신 “멈출 줄 알고 삼갈 줄 알아야 하느니라”.

    # 허씨의 출자 비율 분석

    허만정이 구인회에게 얼마를 출자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당시 허만정의 메모지가 있지만 일부분이라 정확한 계산이 어렵다. 훗날 유력 일간지와 경제 관련 학자들이 나름의 계산법을 가지고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하면서 65% : 35%라는 비율을 제시하였다.

    허신구 평전에는 25% 출자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LG와 GS가 분리할 때 자산규모로 보면 73:27 정도이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허만정의 메모지 숫자를 이리저리 경우의 수를 조합해보면 70:30 비율에 가깝다.

    1947년 12월~1948년 9월 허만정이 투자한 금액에 대한 친필 메모이다. 이 시기는 자체 상표인 ‘럭키크림’을 직접 생산하는 락희화학공업사 설립 때이다. 인(仁)·철(哲)·정(貞)·준(準)은 구인회, 구철회, 구정회, 허준구가 틀림이 없고 각각 납입한 금액으로 추측된다. 이 메모의 허준구 납입 금액은 24% 정도 된다./효주가장/
    1947년 12월~1948년 9월 허만정이 투자한 금액에 대한 친필 메모이다. 이 시기는 자체 상표인 ‘럭키크림’을 직접 생산하는 락희화학공업사 설립 때이다. 인(仁)·철(哲)·정(貞)·준(準)은 구인회, 구철회, 구정회, 허준구가 틀림이 없고 각각 납입한 금액으로 추측된다. 이 메모의 허준구 납입 금액은 24% 정도 된다./효주가장/

    # 허씨의 출자 방법 언급

    구자경의 회고 내용을 살펴보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구자경은 “크림 사업에 이어 플라스틱 사업이 번창하자 허씨 쪽에서 자꾸 논을 팔아 증자를 했어요. 그쪽 형제들도 많이 들어오고 우리 집안에서는 계속 전부 받아 주었지요. 해가 갈수록 사업장 수가 늘어나자 허씨 집안에서 계속하여 자본을 출자하였고, 가능한 한 지분을 많이 늘리려고 하였지요.” 허씨 문중에서 지수면 승내리의 전답을 처분하여 계속 출자를 하였다는 이야기로 볼 때 그 숫자는 계속 증가된 것은 분명하다. 구자경의 회고를 근거로 보면 새로운 사업을 위해 법인 설립이나 공장 설립 시 초기 투자 금액이 필요하다. 이때 사업별로 서로 협의한 후 자본을 출자하여 주식을 분배한 것임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허씨가 출자한 금액의 합계가 25~35%로 추측만 할 뿐이지 정확하게 밝혀진 내용은 현재까지 없다.

    # 조선흥업사 허·구 4인방

    1946년 1월 허준구는 구인회가 부산에서 설립한 조선흥업사에 자본출자를 하면서 동시에 이사로 근무하였다. 구인회와 구철회, 구정회의 구씨 3인방에서 허준구까지 참여하여 이제는 허·구 4인방이 되었다. 네 사람은 새로운 아이템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게 품목이 선정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무료하고 지겹게 보내던 시기였다. 구씨 3인방 중 가장 어린 구정회는 특별하게 진행되는 일이 없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당구장 출입이 잦아졌다. 당구장을 출입하다 보니 화장품 크림 제조회사인 ‘흥아화학공업사’에 다니는 ‘김준환’ 기술자를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구정회는 김준환과 내기 당구도 치고 가끔은 주점에서 세상 사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어느 날 김준환이 매형이 여성용 화장품 ‘아마쓰크림’ 을 생산하는데 이 크림을 한번 판매해 보라고 제안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구정회는 형 구인회에게 당구장에서 만나 김준환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전달하였다. 동생 구정회로부터 화장품 판매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구인회는 허준구와 함께 부산 시내에서 면밀하게 화장품 산업에 대한 시장조사를 해 보았다. 가능성이 있다는 긍정 요인이 많자 구인회는 화장품 판매 사업을 하기로 결심하였다.(구인회 LG그룹 회장, 기록. 이래호 저. 청미디어 참고)

    구인회와 허준구는 ‘아마쓰크림’ 판매 대리점으로 서울을 선택하였다.

    지수면 승산리 지신정 허준의 고택 방 벽에 걸려 있는 가훈으로 誠敬(성경, 정성스럽게 공경함), 孝友(효우,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야 함), 勤儉(근검, 부지런하고 근검절약)의 뜻이다. 허씨 가문의 생활과 공간, 시간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깊은 뜻이 있는 가훈이다./유문선학예사/
    지수면 승산리 지신정 허준의 고택 방 벽에 걸려 있는 가훈으로 誠敬(성경, 정성스럽게 공경함), 孝友(효우,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야 함), 勤儉(근검, 부지런하고 근검절약)의 뜻이다. 허씨 가문의 생활과 공간, 시간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깊은 뜻이 있는 가훈이다./유문선학예사/
    구철회는 형 구인회와 진주에서 구인회포목상점을 공동설립한 분이다. 허만정의 3남 허준구의 장인이기도 하다./구평회사진첩/
    구철회는 형 구인회와 진주에서 구인회포목상점을 공동설립한 분이다. 허만정의 3남 허준구의 장인이기도 하다./구평회사진첩/

    # 왜 허준구를 가장 먼저 구씨 기업에 보냈을까

    허만정의 8형제 중 세 사람만 구인회의 경영에 참여하였다. 형제들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3남인 허준구가 가장 먼저 구인회와 동업 시작에 참여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장남 허정구는 1936년 대학을 졸업하고 마산에서 방직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운영하였는지 기록은 정확하지 않지만 1947년 전후로 볼 수 있다. 1948년 허정구는 마산방직을 정리하고 서울로 가서 이병철이 설립한 삼성물산공사에 취업을 하였다. 차남 허학구는 1943년 일본에서 귀국한 후 큰형 허정구가 객지에 나가 있어 마을 이장을 하면서 아버지 허만정을 도와 가세를 관리하는 장손 역할을 하였다. 3남 허준구는 1943년 일본에서 귀국한 후 지수면사무소에 근무를 하던 중이었다. 1945년 5월 결혼을 하면서 분가하여 부산으로 가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부산에서 취업이나 사업을 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허준구의 장인은 구철회로 구인회의 동생이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구인회는 더 큰 사업을 위해 진주에서 부산으로 사업장을 옮겼다. 진로를 탐색중이던 맏사위 허준구를 보고 장인 구철회가 “허서방, 처백부 되는 구인회께서 진주에서 포목상점을 정리하고 부산에서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함께하면 어떨까?”하고 제안하였다. 그 후 허준구의 아버지 허만정이 1946년 1월 구인회를 만나 자본 출자를 하기로 하였다. 비록 이 자본이 허만정의 자본이든 유산으로 물려받은 허준구 개인의 돈이든 허씨 집안의 자본인 것은 분명하다.

    이래호 LG그룹 구인회 회장과 기록 저자
    이래호 (구인회 LG그룹 회장, 기록 저자)

    이래호 (구인회 LG그룹 회장, 기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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