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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사막을 만들어 거기 남는 것- 유승영(시인)

  • 기사입력 : 2023-09-14 19:2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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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은 인생을 쏙 빼닮아 공허하고 공허해서, 그 느낌만 전달되면 작품으로 성공하는 것인데 만져지지도 보이지도 않는 공허를 보지 않고도 믿고 따른다. 점점 뜨거워지는 여름을 우리는 믿고 살아내듯이. 어떻게든 힘을 내어 성실하게 살아내야 완성되는 것이기에, 삶과 문학은 닮아있다. 어느 한쪽에 정신을 팔면 한쪽은 잠시 잊고, 전 존재를 걸고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 삶이라면 문학의 그것도 다르지 않다. 삶을 담보로 하며 쓰는 일은 그야말로 짜릿한 모험이며 투기며 또는 투자일지 모르겠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있다. 도무지 갈 것 같지 않던 여름이 총총 사라졌다. 출판부서의 적응은 그야말로 삶과 문학이었다.

    이번 여름의 공단(工團)길은 특별히 새로웠다. 나의 청춘의 시간을 보냈던 서울의 구로공단이었다. 초록 잔디 위에 하얗고 아담한 회사건물은 그림 같았고, 생산라인을 겸비한 지금으로 말하면 한국 최초의 IT 기업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시끌벅적 무역부는 출근과 동시에 자신의 업무를 하느라 열심이었던. 최고의 인재들과 최고의 시간이 새삼스럽다. 오랜만의 공단길이다. 공단길은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다. 반듯하고도 규격에 맞는 큼직한 건물들이 깔끔하고, 청색 아니면 간편한 복장을 하고 사원증을 달거나 그렇지 않거나, 촘촘히 걷거나 통근버스에서 내리거나 각기 다른 침묵으로 사람들이 오고 간다. 사람냄새가 나는 공단길이다. 사는 일이 버겁고 내가 가장 힘겹다는 생각이 들면 공단길을 걸어보라. 낙엽 지는 공단길은 결코 쓸쓸하지 않으며 속이 꽉 찬 언니 같은 길. 성실하게 출근하는 사람들이 있고 내일을 꿈꾸는 사람들로 빛나는 길이다.

    이 뜨겁고도 무더운 여름을 보낸 기념으로 요가를 한다. 수고한 여름을 보상해 주듯 온전히 내 몸에 집중해 본다. 내가 나를(내 몸을) 이겨 내야 하는 시간, 어쨌거나 몸을 재생시키는 시간이다. 굳어진 생각을 정돈하고 오늘의 한계를 넘어보는 시간이다. 한쪽 발을 들어 올리고 한쪽 발로 몸을 지탱하는 아사나가 있다. 몸의 모든 체중을 한쪽 발에 의식하며 서 있는 일이다. 오로지 호흡으로 지탱해 내는, 흐트러짐 없게 정신을 가다듬는 시간이다.

    몸에 힘을 빼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있는 대로 힘을 주고 썼던 시가 보이고 군더더기 없는 카프카가 보인다. 시는 힘을 주고 쓰는 게 아니라 힘을 뺐을 때 시인이 시에 걸려드는 것이다. 대상과의 질문에 공감을 주면서 시대나 국경을 초월하더라도 힘을 빼내어 쓴 시.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숨 같은 시. 온전히 힘을 빼내고 내 몸으로부터 가장 가볍고 가장 날것의 호흡으로 시를 쓰고 싶다.

    공단길의 새삼스러운 그 날것으로, 포착된 대상을 익혀가며 어디쯤엔가 와 있는 나를 발견하는 일이 결국 쓰게 하고 읽게 한다. 요가 첫날 엉망진창이 된 몸의 뒤엉킴이 비로소 내 모습이었던 것이다. 하루 반나절을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아침이 되어서야 팔다리가 정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한 줄 문장을 위해 겸손하게 그 대상에게 경의를 표하며 공단길에서 느꼈던 최초의 날것을 생각한다. 시는 곧 삶에 대한 열정이다. 힘을 뺀 몸에서 나오는 대답 같은 것이다. 하늘이 높아지고 바람 냄새가 분명히 달라졌다. 내가 있는 뿌리산단로에도 가을이 올 것 같다. 여름을 이겨내느라 작아진 키가 한 뼘씩 자라는 9월이면 좋겠다.

    유승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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