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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송년회- 조경숙(수필가)

  • 기사입력 : 2023-12-14 19:5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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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해를 톺아보는 연말이다. 그랜드 호텔 뷔페에서 아이들이 줄을 섰다. 갖가지 음식을 담느라 분주하다. 연말이 다가오면 매년 열리는 전국 ‘청소년회복센터’ 송년회다. 센터 청소년들과 관계자, 후원자가 한 가족이 되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장기자랑도 펼친다. 아이들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친다.

    회복센터는 법원에서 위탁된 청소년들의 대안가정이다. 자신이 속해 있는 센터 이름을 가운데 두고 원탁에 둘러앉은 아이들은 자신감에 찬 눈빛을 마주한다. 든든한 뒷배라도 있는 양 어깨를 폈다. 언제 이런 자리에서 마음 놓고 풍성한 식사를 해봤을까. 먹고 또 먹고 연신 재잘거리는 모습이 천진난만하다.

    2011년 회복센터 초기 소년부 C판사님은 지인과 함께 호주머니를 털어 법원 근처 고깃집에서 송년회를 처음 열었다. 창원지방법원에서 위탁한 청소년들이 조촐한 식당에서 어깨를 부비며 앉았다. 입구에는 신발이 수북했다. 자신의 손으로 판결했던 소년이다. 50여명의 아이들은 무려 200인분을 먹었다. 식당 주인과 자리를 만들어준 지인분은 혀를 내둘렀지만 뿌듯했다. 아이들은 고기를 먹은 것이 아니라 마음의 허기를 채운 것이 아니었을까. 마음 한가운데 한 줌의 씨를 뿌린 것 같았다.

    그늘에도 꽃은 핀다. 송년회는 C판사님의 선행에 힘을 보태어 (사)만사소년이 만들어지고 주축이 되었다. 매년 부산과 지역 CEO의 후원으로 이어졌고 올해는 한마음병원에서 자리를 만들었다.

    만사소년은 ‘모든 일은 소년으로’라는 슬로건으로 비행청소년과 회복센터를 후원하는 단체이다. 먹을거리 지원부터 축구단, 국내외 희망여행, 북-콘서트와 독후감 쓰기, 직업교육, 회복과 마음수양의 다양한 프로그램은 소년들의 정서적 박탈감을 채우고 감성과 이성을 깨운다. 학교와 가정에서 경험할 수 없던 사람의 온기와 사랑이 담겨 있다.

    C판사님은 공무외 사적인 활동을 비행청소년을 돌보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茶香萬里(다향만리)’라 했다. 좋은 일은 꽃향기처럼 퍼져나간다. 송곳을 호주머니에 넣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지난해부터는 C법원 소년부 L판사님도 합세했다. 휴가도 반납하고 센터 소년과 회복 프로그램의 하나인 2인 3각에 자청하여 8박 9일의 긴 도보여행을 감행했다. 손수 지역사회와 연대하며 센터 청소년 1인에 멘토를 연결하여 ‘걷기학교’를 운영한다. 소년 일이라면 사회적 지위와 권위는 발아래 내려놓는다. 늘 모든 생각의 출발과 끝은 비행청소년을 ‘무엇을 어떻게 도와야 될까’를 화두처럼 들고 있다. 판결에는 저울같이 엄격한 잣대지만 소년을 위해 아낌없이 가슴을 연다.

    센터 친구들의 공연에 아이들의 함성은 호텔 연회장 천장을 뚫기라도 할 것 같다. 판사님과 후원자분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화선지에 먹물처럼 번진다. 마음을 나누는 따스함은 세상의 혹한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리라.

    누군가로부터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마음의 근육이 생기는 일이다. 불안한 가정과 적응하지 못했던 학교생활에 비틀거리며 걸었지만 판사님과 후원자의 손길에 아이들은 햇살 아래 길을 연다. 내년에는 회복센터 소년으로 만나지 말고 후원자로 만나자는 판사님의 격려사가 가슴을 출렁이게 한다.

    조경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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