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30일 (화)
전체메뉴

‘영원을 담은 조각’ 고향 경남을 품다

경남도민의집 ‘김영원 조각가 특별전’

  • 기사입력 : 2024-01-02 20:53:15
  •   
  •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 빚은 현대조각 거장
    시대적 상황·가치관 담은 작품 43점 전시

    창원 출생 김해서 중·고교… 고향 애정 깊어
    “지금은 고향 떠나 살지만 돌아갈 곳은 김해”


    김해평야에 파랗게 물결치는 보리밭 이랑을 거닐던 소년은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예술로 인간과 세계를 표현하는 조각가가 됐다. 서울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을 빚은 ‘현대조각계 거장’ 김영원 작가의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창원에 마련됐다.

    ◇함께하는 영원을 담다= 경남도민의집에서 김영원 특별전 ‘함께하는 영원의 시작’이 오는 2월 4일까지 열린다. 전시에는 김 작가의 연작들을 중심으로 한 조각과 회화 등 43점이 시대별 흐름에 따라 구성돼 있다. 초기 작품이며 인체조각을 통해 철학적 사유를 투영한 ‘중력 무중력’, ‘그림자의 그림자’ 시리즈와 기공명상을 통한 드로잉과 조각으로 새로운 미학을 화두로 던지는 최근 작품 ‘기(氣)오스모시스’ 시리즈까지. 작품들 면면에서는 당대의 시대적 상황과 그를 바라보는 김 작가의 고찰이 담겨 있다.

    김영원 作 ‘그림자의 그림자-합1’
    김영원 作 ‘그림자의 그림자-합1’
    김영원 作 ‘중력 무중력’./경남도/
    김영원 作 ‘중력 무중력’./경남도/

    ‘중력 무중력’ 시리즈는 후기 산업사회에서 익명화되고 탈진한 사람들의 현상을 표현하고, 인체를 파편화시키며 스스로 사물화되는 인간이 도달하는 허무를 보이기도 한다. 추상예술에서 사실주의적 조각으로 넘어온 작가가 1970~1980년대의 한국을 바라보던 시선이 담겼다.

    김 작가는 “당시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최루 가스에 눈물을 흘리던 때가 많았다”며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었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현실적인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얘기했다. 이어 “산업화 사회로 나아가는 현실 속에 인간은 ‘기능적’이기에 정신보다 신체성이 우선했다. 인간과 세계 전체가 물질화되는 과정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1990년대 김 작가가 배운 기공명상은 불교적인 철학이 들어간 ‘그림자의 그림자’와 ‘기(氣)오스모시스’ 시리즈로 이어진다. 김 작가는 “인체를 파편화하는 작업을 하다가 건강이 나빠져 기공명상을 배우게 됐다”며 “그때 ‘기’를 만나게 됐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보다 더 큰 세계가 그 속에 숨어있었다. 나에 대한 고찰을 시작했고 이는 불교적인 개념으로도 이어졌다”고 말했다. ‘기(氣)오스모시스’ 시리즈는 김 작가가 기공명상을 하며 춤추듯이 흐르는 몸짓으로 조각을 긁어내거나 그림을 그려낸 결과물들이다.

    김영원 作 ‘空(공)-에너지 1‘2’3(Empty-Energy 1‘2’3)
    김영원 作 ‘空(공)-에너지 1‘2’3(Empty-Energy 1‘2’3)

    ◇다시 경남으로= 창원에서 태어나 중·고등학교를 김해에서 나온, 경남을 고향으로 둔 김 작가에게 경남에서 열리는 전시들은 모두 각별하다. 그에게는 유년시절 낙동강 강둑에 누워 바라본 구름의 흐름, 바람에 출렁이던 보리밭의 기억이 가득했다.

    김영원 조각가
    김영원 조각가

    “태어난 곳은 창원 대산면이었고 이후로 김해에서 살았죠. 할아버지는 타고난 농사꾼이었고, 처음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도 바로 농사를 시켰어요. 2년 정도 농부로 살았는데, 나도 학교에 가고 싶어서 할아버지를 졸라 법대를 가서 군수로 내려오겠다 약속을 했지요.”

    김해 한얼고등학교를 들어간 김 작가는 어느 날 공작시간에 찰흙으로 조각을 하게 됐다. 자신의 손을 보며 작품을 빚었는데, 이를 본 교사가 ‘다음 주에 김해 왕릉에서 진행되는 전국학생미술실기대회로 나와라’고 했다. 미술에 대해 단 한 번도 배워보지 못했던 김 작가는 그날 대회에서 최고상인 특선을 수상했다. 그때 만든 것은 일본으로 귀화한 영웅 레슬러 ‘역도산’이 상대를 업어치는 작품이었다.

    “이후로 여러 곳에서 상을 받아 왔는데, 그래도 여전히 목표는 법대였어요. 할아버지랑 약속했으니까요. 근데 학원을 다니고 공부를 하다 보니까 내 성적으로 못 갈 것 같은 거예요. 한 날은 학원에 있는 어떤 친구가 본인이 홍익대학교를 지망한다고, 거기에는 조각가니 뭐 예술가들이 많다고 얘기하는데, 한번 가볼까? 싶은 마음이 들어서 홍대에 가서 실기 필기를 다 봤어요.”

    그때까지도 김 작가는 입시미술 한 번을 배워본 적이 없었다. 데생의 기초도 몰랐다. 필기는 잘 쳤지만, 실기는 ‘엉망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럼에도 그는 대학에 붙었다. 나중에 들으니 교수들이 ‘작품에 큰 개성이 있다’고 그에게 기본 점수를 줬다고 한다. 그렇게 홍대 조소과에서 미술을 배우기 시작하고 어느덧 전국에서 손꼽히는 조각가가 됐다. 지금은 고향을 떠나 살고 있지만, 고향에 대한 애정은 여전해 김해에 자신의 작품을 기증하고 경남의 여러 전시 기획에 호응하는 등 지역과 소통하고 있다. 그는 “결국에 돌아갈 곳 또한 김해”라고 얘기한다.

    “김해 유하리가 집성촌이고, 또 선산이 있어요. 그 고분에 나와 아내의 묘지가 있어 언젠가 다시 김해로 돌아가겠죠. 다시 그 보리밭으로요.”

    글·사진= 어태희 기자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어태희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