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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5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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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에세이] 지금 내가 겪는 시간- 박태인 시인(202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 기사입력 : 2024-01-25 19:2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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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잣집 친구를 보면 친구의 영혼과 내 영혼이 바뀌길 바랐다. 성경책을 들고 밤마다 찾아오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개미처럼 내 엄지손톱 위에서 반 토막 나길 바랐다. 엄마는 아빠의 월급날이면 어두워지길 기다렸다가 누군가에게 쫓기듯 언니와 나를 시장으로 데려가 옷이나 머리핀을 사주었다. 엄마는 우리에게 먹고 싶은 것이 없냐며 물었지만, 언니와 난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저었다.

    타일 공장에 다니는 엄마 모르게 나는 자주 학교에 가지 않았다. 초록색 대문 옆, 작은 구멍 하나 만들어 나는 벌레처럼 구김 없이 드나들었다. 산과 들로 학교 대신 논두렁 볏짚 위에 누워서 양손으로 하늘을 말아 쥐거나, 종이처럼 구겨버리면서 온종일 놀았다. 어떤 날은 빈집 마루 위에 앉아서 마당에 울음소리를 몰래 심는 주인집 고양이를 한참 바라보거나 옷장에 들어가 오빠가 아끼는 하얀색 카디건을 입고 잠들었다가 엄마한테 혼나면서 저녁밥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 집으로 담임 선생님께서 찾아오시면서 결석은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빨이 흔들릴 정도로 술을 마셨던 아빠는 나보다 더 자주 집에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상장을 받았다. 학교에서 주최한 시화전에 내 시가 전체 우수상. 선생님께서 고개를 갸우뚱거리시면서 상장을 주셨고, 나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상장을 받았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떨어지는 낙엽이 내 마음과 나무에 구멍을 낸다고 했다. 나뭇가지에 걸린 비닐봉지가 구멍 난 엄마 팬티 같다고 했다. 공부에 관심 없던 나는 상상과 공상 사이를 자주 오며 갔다. 해야 할 건 상상인데 내가 했던 건 공상이나 망상이 아니었나 생각 든다. 라디오를 켜둔 내 방에 엎드려 쓰는 일기는 출렁거리며 가라앉는 집 안에서 번번이 나를 건져주었다.

    지옥과 천국은 지금 내가 겪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날씨가 궁금하면 창문을 열어보듯, 풍경을 본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을 보고, 사람을 본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을 보고, 마음을 본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내가 본 것은 삐거덕거리는 창문과 삐거덕대는 소리만 들었던 게 아니었을까.

    지독한 파마약 냄새를 풍기며 고등학교 진학 상담을 위해 학교에 찾아온 엄마를 피해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서 엄마가 긴 웨이브 머리의 주인집 아주머니처럼 바뀌길 바랐다. 얼마 전 엄마의 흰머리에 검은 물을 들이는 언니를 쳐다보며 문득, 엄마의 열여덟 살이 궁금했다. 엄마도 한때는 키가 큰 목련처럼 봉오리를 가득 달고 꿈을 꾸고 있었을 텐데. 긴 생머리가 코스모스꽃들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싶었을 텐데.

    마당 하나에 목줄 맨 창문이 가끔 개처럼 짖을 때마다 돌아오지 않으려고 지붕을 들고 계속 산책 다녔던 엄마에게, 무덤 속에서도 여전히 술 심부름을 시키는 아빠에게 아직 발아되지 않은 상실과 아름다움의 씨앗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하며, 이 겨울을 데리고 묵묵히 꽃으로 가고자 한다.

    박태인 시인(202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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