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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에세이] 봄을 당기다- 장경미 시조시인(202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 기사입력 : 2024-02-01 19:3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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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가락 사이로 눈 녹듯 빠져나간 일월의 잔상이 사라지기도 전에 이월이 들어와 앉는다. 꼬물꼬물 연둣빛 움이 비친다.

    새로운 해를 여는 해오름달과 새 학년이 시작되는 물오름달에 끼인 둘째 언니 같은 시샘달. 푸릇한 삼월로 건너가기 위한 든든한 징검다리 같다고 할까.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 배우나 우아한 백조의 바지런한 다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눈에 선명히 보이는 삼월에는 그저 행하면 된다. 우리 반이 된 학생들을 만나는 순간부터 몸과 마음은 자동반사로 움직인다. 하지만 이월은 배정된 학생들 이름만 달랑 알 뿐이다. 베일에 가려져 궁금증은 극에 달하고 마음의 다짐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학교 이동부터 교실, 학년 이동 등 새 학년맞이를 위해 만반의 채비를 해야 하는 이월이다.

    떨켜를 만들어 모질게 이파리를 끊어내고 기어이 긴 겨울을 홀로 버틴 나무도 바빠 보인다. 빈 가지를 채울 준비를 하나 보다. 물관과 체관 청소를 잘해 두어야 날마다 파릇한 새순을 밀어 올릴 수 있을 테니. 언제 문을 박차고 들어올지 모르는 봄을 코앞에 두고 한눈팔거나 늑장 부릴 수 없다.

    하늘은 비를 뿌려 나목의 묵은 때를 벗기고 겨우내 쌓인 창문틀 먼지도 씻겨낸다. 촉촉이 땅을 적셔 발아할 길을 열고 나무의 발가락도 간지럽힌다. 겨울잠에 들었던 땅속 친구들에게 알람을 보낸다. 만상을 깨우는 소리가 요란하지 않다. 다그치지 않으나 부드러운 재촉의 손길은 등을 쓰다듬어 아기를 깨우는 엄마의 손 같다.

    사계절 가운데 가장 기다려지는 봄은 그저 오는 게 아니었다. 이월의 성실한 준비가 없었다면 그저 그런 봄일지 모를 일이다. 겨울이 시샘을 부리며 막아도 기어코 우리 앞에 봄을 데려다 놓는 건 순전히 이월 덕분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억척스러운 면만 가진 이월은 아니다. 일 년 중에 날수도 제일 적으면서 조커를 가진 듯 여유 있어 보인다. 붉은빛 음력설을 품고 있어 그런가. 달력의 붉은 숫자는 위안을 준다. 긴장을 늦추고 쉬어가게 한다. 장거리 달리기를 위한 꿀 같은 쉼이다. 멀리 떨어져 지내는 가족에게 갈 때는 반년어치의 인사를 미리 한 것으로 쳐주기도 한다. 훈훈한 정이 오가도록 돕는 관계의 이음매 역할도 한다.

    이월이 가진 양파 같은 매력은 게으른 봄을 깨우기에 충분하겠다. 미뤄두었던 집 청소나 교실 정리, 혹시 모를 학교 이동을 위해 짐도 싸야겠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봄을 맞아도 당황하지 않도록 이월을 알차게 보내야겠지.

    매화 향 매달아 걸고 꾀는 이월에 홀딱 넘어간 봄이 문 앞을 서성인다. 휙 당기면 언제라도 끌려들어 올 것만 같다.

    장경미 시조시인(202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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