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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6월 26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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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간이역] 사평역에서- 곽재구

  • 기사입력 : 2024-02-15 08: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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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과 뼈아픔도 다 설원(雪原)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눈 내리는 겨울,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톱밥난로를 쬐는 사람들의 애환이 보입니다. 아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묵묵히 살아가는 사연들이 다양한 감각으로 꽃피고, 시 속에 등장하는 인물 한명 한명의 인생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문학적 체험은 내가 남이 되어보는 연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왔다 가는 기차처럼 긴 인생 이야기로 펼쳐보거나 작품 속 인물이 되어 짊어진 삶의 무게에 공감해보면 더욱 실감이 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사평역’은 가상의 역이라고 하니까 추억이 서린 역을 떠올리면서 또 이 시를 바탕으로 쓰인 소설이 있다고 하니까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읽으면 좀 더 폭넓은 감상을 할 수 있습니다. 눈 덮인 풍경 이면에 담긴 냉혹한 현실도 들여다볼 수 있어야겠지요. 막차는 언제 오고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화자의 시선이 따뜻한 길을 열며 우리를 안내합니다. ― 최석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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