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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8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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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에세이] 참꽃 단상- 조경숙 수필가(2019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

  • 기사입력 : 2024-03-28 19:3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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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빛 유혹이 일렁이는 봄이다. 오리나무 군락에 수북이 쌓인 낙엽 위로 성냥개비 같은 가녀린 줄기 끝에 진달래꽃이 핀다. 살랑이며 스치는 실바람에 수줍은 미소가 하늘거린다.

    참꽃은 꽃 중의 꽃이라고 붙여진 이름일까. 겨우내 매서운 추위를 견딘 대가로 부여된 작위가 아닌가. 진달래의 속 이름인 참꽃은 잊었던 옛이야기도 소환시키는 마력이 있다.

    부모님의 젊은 시절 허기진 보릿고개 배를 달래던 꽃이기도 하다. 어릴 적 뛰놀던 뒷동산에 지천으로 피었던 꽃은 쟁여 두었던 추억의 사진첩을 꺼내게 한다. 자루째 따 온 참꽃, 마루에 걸터앉아 입술이 시퍼레지도록 먹었던 아련함을 머금고 있다.

    참꽃은 봄 햇살 그윽한 날 밋밋한 가지 끝에 꽃눈이 뜨는가 싶으면 이내 봉오리가 맺힌다.

    마치 한량무를 추는 무용수의 날 선 버선코처럼 오뚝하면서도 도톰하다. 이삼 일 지나면 꽃술은 한삼자락을 거침없이 내던진 것처럼 허공을 향한다. 짙은 분홍 잎은 세상에 온 몸을 내맡기듯 활짝 핀다. 발그레한 분홍빛에는 곱던 새색시 적 미소가 숨겨져 있고 장가가던 아들의 설레던 마음도 담겨 있는 것 같다.

    참꽃으로 화전을 만든다. 겨우내 무채색으로 움츠린 마음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게 하는 화전에는 선명한 빛깔로 활짝 핀 꽃이 좋다. 꽃잎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따야 한다.

    미세먼지로 새콤한 맛을 금세 볼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꽃술을 떼어내고 흐르는 물에 살랑살랑 씻는다.

    봄바람 들여놓고 시작하는 화전놀이에 빠질 수 없는 꽃이다. 팬에 두른 기름 자글거리는 소리만큼 아이들도 흥겹다. 빙그르 둘러앉아 하얀 쌀가루 반죽을 비손처럼 비비며 돌린다. 납작하게 눌러 팬에 올리면 꿈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처럼 가장자리부터 반지르르 투명하게 익는다. 마치 살짝 숨겨 두었던 속마음이 다 비치는 것 같다. 화전 만들기가 처음인 아이들은 군침부터 흘린다. 수줍은 꽃잎 한 장을 동그란 떡쌀 위에 얹어놓는다. 봄 나비 한 마리 포로로 날갯짓하며 사뿐 내려앉는 것 같다. 어떤 화(花)과자에 비교할까.

    참꽃은 공간의 미학까지 채운다. 가지째 꺾어 온 참꽃을 세월 함께 살아온 한 되짜리 찌그러진 양은주전자에 꽂는다. 사람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에도 반전이 있는 것처럼, 볼품없던 주전자는 참꽃 덕분에 화려한 변신에 성공했다. 오히려 찌그러짐과 화려한 꽃의 극적인 대비가 생과 사의 조화로움까지 함묵하고 있는 듯하다. 햇살 드는 창가에 자리 잡은 참꽃 주전자는 채운 듯 채워지지 않고, 머문 듯 머물지 않고, 비운 듯 비우지 않은 자태로 공간의 미학까지 완성한다.

    참꽃 화전에 찻물 익는 소리까지 보태지면 사사로운 마음은 공고(鞏固)해지고 봄이 오는 길목으로 문을 열게 한다. 겨울과 봄을 잇는 내 인생의 새로운 봄날, 허기진 영혼을 채워 가슴까지 촉촉해지는 화려한 분홍빛 축제의 날이 펼쳐진다.

    조경숙 수필가(2019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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