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 떠날줄 아는 삶이 아름답다
- 기사입력 : 2002-09-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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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에는 샐비어가 만발하고 있었다. A씨는 교정을 돌다 문득 놀라는 자
신을 돌아봐야 했다. 샐비어가 그에게 일깨운 것은 한 무더기 꽃이 제자리
에 피어 있음이었고 인생도 그처럼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
했다. 그는 유학을 결심하고 홀연히 학교를 떠났다. 그러나 유학의 결과는
그렇게 이상적이지 못했다. 당초 희망대로 그는 학계로 가지 못하고 언론계
에 종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 더
나빠 있을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용기있는 떠남에 행운이 따라주지 못
한 것이다.
몇 해 전 이해찬 의원이 교육부장관에 있을 때다. 그는 “앞으로 한 가지
만 잘 하면 얼마든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해 말썽을 빚었다. 하지
만 말인즉 옳다. 문제는 모두가 한 가지에만 매달리니 곧 비범함이 평범함
으로 되고마는 격이다. 그가 물의를 일으킨 것은 그런 말을 공개적으로 했
다는 점이지, 정말 한 가지만 잘 하면 대학은 말할 것도 없고 인생자체를
뜻있게 보낼 수 있다.
떠날 때는 미리 무슨 일을 어떻게 한다는 목표가 설정돼야 하며 이의 완
성을 위해서는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포부가 철저해야 한다. 운동
권의 `산 자여 따르라`는 데서도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고
하지 않던가. 한 가지에 매달릴 줄 알고 이를 위해 떠날 줄 알며, 떠나서
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삶이 아름답다.
B씨는 중학교를 졸업하는 그해 겨울부터 한 가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담요로 창문을 온통 덮어 밤낮이 따로 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손에 든 기
타 하나만이 그의 반려가 됐다. 그는 기타를 치고 또 쳤으며 이 때문에 손
가락 마디는 벗겨져 허물어졌다. 그래도 쉬지않고 노래하며 기타를 쳤고 때
로는 작곡도 했다. 그런 그는 마침내 집을 나와야 했다. 나와서는 줄기찬
노력을 하였고 마침내 국민의 가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오늘의 조용필 가수다. 그에게는 떠남과 집념, 그리고 행운이 모두 잘 어
울려줬던 것이다.
C씨는 떠나야 할 때 정작 떠나지 못했다. 그가 대학에서 전공한 것은 중
문학이었다. 일부 교수들은 그를 `간세지재(間世之材)`, 즉, 여러 세대를
뛰어넘어 드물게 나온 수재라 봤다. 그는 이른바 `정수`장학생으로 대학생
활을 보냈고, 졸업하면서 육영수 여사 비서관에 특채됐다. 그러나 그의 맏
형이 야당에 있다는 이유로 신원조회에서 걸려 청와대를 그만둬야 했다. 대
신 청와대는 그를 포항제철로 보냈다. 거기서 그는 오래 중국 지사장을 맡
는 등 임원까지 지낸 후 퇴직했다. 그는 잘 살아왔지만 마음 한켠은 늘 울
적하다. 학자가 되지 못한 자괴감 때문이다.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함은 삶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C씨는 이 두려
움으로 타고난 재주를 스스로 사장시키고 말았다. A씨의 경우, 그런 두려움
에서는 홀가분했지만 떠남에서 오는 효과를 최대한 살리지 못했다. B씨만
이 떠남의 의미를 만끽한 셈이 됐다. 사실 두려움이란 약자의 본성이다. 이
러기에 기독교 성경에서 “뭘 마실까,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지 모
른다. 그러나 정작 가정을 떠나거나 직장을 떠나서는 어떻게 먹고살지가 실
제 두려운 것이다.
일찍이 도연명은 그렇게 전전긍긍하는 자신을 비웃었다. 29세에 처음 벼
슬길에 나온 그는 이따금 사임했으며 41세 때는 현령을 끝으로 아주 관직
을 떠났다. 이때 읊은 것이 그 유명한 `귀거래사`다. 그는 “전원으로 돌아
가자”며 “내 어찌 다섯 말 쌀(五斗米)을 위해 향리의 작은 벼슬아치에게
허리를 굽힐까보냐”고 했다. 전원에 퇴거한 그는 몸소 괭이 들고 땅을 일
구며 가난과 질병 속에서도 62세까지 살아 금쪽같은 글을 남겼다. 그의 떠
남이 없었던들 6조(六朝) 최고의 시인이란 그의 명성이 지금껏 전해졌을
까. 떠나라, 그랬으면 흔들리지 말라. /허도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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