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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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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밥벌이와 친일

  • 기사입력 : 2004-08-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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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박승훈(사회부 차장대우)

      필자가 태어나던 해 박정희장군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며 5·16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다. 국민학교 1학년 때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했다. 나는 뜻도 제대로 모른 채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그 긴 문장들을 잘 암송해 주변의 칭찬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1학기 내내 노래 한곡 배워주지 않으시던 선생님이 2학기 초 어느날 풍금을 가져오게 해 ‘10월의 유신은 김유신과 같아서 삼국통일 되듯이 남북통일 되어요’라는 노래를 가르치셨다. 우리는 그 노래를 동네에서 목청껏 불렀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입시를 위해 유신헌법 조문들을 배우고 익히던 어느날 ‘대통령 유고’라는 뉴스가 흘렀고. 바로 그날 선생님이 ‘이번 대입에는 헌법은 나오지 않는다’고 단호히 말씀하시던 것을 기억한다.
    20대가 되어 나는 격심한 문화적 충격을 겪었다.

      뜻도 모르는 나에게 10월유신 찬성투표를 하라는 노래를 가르치신 선생님. 그리고 유신헌법을 가르치신 선생님을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선생님들은 60년 대 초 대학을 다니신 분들이었다. 젊은 시절 4·19를 겪은 선생님들이 유신 찬성 노래나 유신헌법을 가르치실 때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오죽하면 박 대통령이 숨진 그날. 지금까지 반드시 외어야 한다고 헌법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유신헌법을 잊으라고 말씀하셨을까.

      그 시절에 산다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나는 지금 내가 그런 야만의 시절에 살고 있지 않음이 너무도 고맙다. 60년대. 70년대. 80년대를 지나는 동안 그토록 많은 민주시민들이 범법자의 멍에를 뒤집어 쓰고. 그들의 고통을 우리 국민 모두가 잊지 않은 덕분이다.

      지금 정치권이 과거사 진상규명 문제로 시끄럽다. 주로 ‘친일진상규명법’에 따른 일제시대 친일과 부일의 과거사에 대한 정리이다. 조선의 국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시기부터 미국과 소련 등 외세에 의한 해방의 시기까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행적을 기록하겠다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였다.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흙 한줌. 쌀 한톨까지 수탈당하며 정신의 백치화를 강요받던 시기였다. 민족시인 윤동주가 히라누마(平沼)로 창씨개명을 하고 몽양 여운형이 방공훈련에 완장을 차고 거리를 활보했다는 그런 시대였다. 면서기를 했으니 식민지 주구였고. 금융조합 서기를 했으니 민중을 수탈했고. 교사를 지냈으니 황국신민교육을 했고. 일본군이나 순사를 했으니 제국주의 앞잡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다. 동쪽을 향해 절을 하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웠으니 다 친일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밥벌이는 예나 지금이나 지겹고 힘든 것이다. 가난하고 힘든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간 것. 그것 자체를 모두 친일이라고 몰아서는 안된다.

      일부에서는 ‘친일’의 개념을 무한정 확대. 이 모든 것을 친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친일진상을 규명하면 ‘끝없는 민족의 자기비하’가 있을 뿐이라며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나 동쪽을 향해 절한 것이나 결국 독립운동가 아니기는 마찬가지 아니냐고 다그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오히려 허무맹랑하다. 친일 진상규명은 가난한 힘든 백성이 그렇게 굴욕의 삶을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든 자들. 그들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전 국민을 친일의 터무니없는 원죄에서 해방시키고. 책임져야 할 자들을 가려 추려내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 시기 동안 한반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꼼꼼이 천천히 찾아서 사실들(facts)을 기록해야 한다. 그래서 다음 세대가 지금 친일 진상을 기록하는 우리세대까지도 냉정하게 평가해서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용서하지 못할 것은 용서하지 않으면서 식민지와 분단의 시대를 ‘역사적’으로 반성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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