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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20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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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길 시인이 찾은 거제 '바람의 언덕'

  • 기사입력 : 2005-03-1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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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인들이 바라보는 풍경은 어떤 색깔일까. 바람 한줌에도. 사뿐사뿐히 내리는 가랑비에도 그들의 가슴은 열정으로 가득 찬다. 아름다운 자연. 숨겨진 비경뿐만 아니라 길 한켠의 돌부리까지 그들이 바라보는 그들의 색깔을 에세이 형식으로 담는다.


       조은길 시인이 찾은 거제 '바람의 언덕'

       숨막히는 그리움의 끝 그곳엔…


        거제 장승포에서 ‘바람의 언덕’까지 섬과 바다와 산을 배경으로 미로처럼 휘어진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가면서 문득 “숨겨둔 정부(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몰래 나 홀로 찾아드는 외진 골목길 끝.”으로 시작되는 이수익 시인의 시 ‘그리운 악마’의 시구가 떠올랐다. 시인은 자신을 옭아매는 일상을 훌쩍 떠나 이렇게 아름답고 호젓한 길의 끄트머리에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정부를 감추어두고 싶었을 것이다. 그랬다. 거제도 ‘바람의 언덕’은 아무도 모르게 꼭꼭 숨겨둔 정부처럼 이정표도 안내판도 없는 작은 어촌을 감싸안은 동산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3월 초순. 아직 봄물이 들지 않은 ‘바람의 언덕’은 동백꽃나무 머리수건을 얌전히 쓴 살집이 풍만한 여인이 무릎을 웅크리고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다. 바람에 잔가지를 다 빼앗기고 맨다리로 비스듬히 서있는 나무들. 기계로 잘라낸 듯 가지런한 키 작은 풀과 풀꽃들. 어느 칼바람이 도려낸 듯 반이 날아가버린 언덕바지의 무덤. 언덕의 아랫도리 바위에 그어진 거친 파도자국 등이 이곳을 바람의 언덕이라 이름지은 까닭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바다새가 끼리끼리 속닥거리고 있는 ‘바람의 언덕’ 끝에 서면 멀찌감치 물러앉은 노자산과 해금강이 어깨를 걸친 듯 아늑히 ‘바람의 언덕’을 감싸고 있는 모양이다. 이런 모양은 거제도의 섬과 바다와 산이 빚은 흔하디 흔한 풍경 중의 하나인데 왜 하필 거제도의 바람이 이곳에서 많아지고 강해졌을까? 경치 좋고 쉬기 좋은 곳에 사람이 붐비듯이 어쩌면 거제도를 돌던 바람들이 이 언덕에서 쉬어 가는 것은 아닐까? 바람도 기껏해야 젖은 일기나 쓰고 기도문이나 쓰는 피조물에 불과하니까. 어찌 벗어나고 싶고 소유하고 싶은 것이 없겠는가. 그도 그럴 것이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의 언덕’은 제주도의 오름(작은 화산의 분출로 생긴 흙더미)처럼 완만한 곡선이 어머니의 품처럼 푸근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제 이름자도 모르는 바람에게 이 언덕이 그에게 무엇이었는지. 왜 그랬는지는 도무지 알아낼 수 없는 일이다. “알 수 없다는 것이 단 하나 영원한 진리”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찍이 설파한 것처럼 인간이 언제 한 번이라도 자연과 소통된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있고 아무리 몸을 세워도 닿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서러움인가. 무엇인가가 그 서러움을 달래주고 잊게 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연애이든 일이든 종교든 예술이든 장난이든 매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망부석 전설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듯 서럽게 바다를 향해 주저앉은 무덤이 있는 ‘바람의 언덕’. 후후후 휘파람 소리로 언덕을 샅샅이 어루만지고 있는 바람. 혹 이 언덕이 바람이 꼭꼭 숨겨둔 정부가 아닐까? 오! 아직까지 ‘바람의 언덕’으로 가는 이정표가 없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지금은 유수한 드라마의 촬영장소로도 알려지고 숨어있는 아름다운 곳을 뒤지고 다니는 여행가들의 입소문을 탄 덕(?)에 산책하기 좋게 계단도 만들어 놓고 알맞게 가로등도 세워놓고 운치 있는 벤치까지 놓여있어 거제도 명소의 하나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마을 주민들에게 ‘바람의 언덕’은 파도가 사나워서 스티로폼부들 하나 묶어놓지 못하는 그저 물이 빠지면 고동과 게를 채취하는 갯바위의 하나일 뿐인가 보다. 바위를 차곡차곡 쌓은 듯한 바람의 언덕 갯바위를 비닐우장으로 무장한 아낙들이 먹이를 찾는 파충류처럼 몸을 납작 접은 자세로 더듬고 있었다. 언덕 옆 방죽 가에는 지난 태풍 때 무너진 방죽이 아직 복구되지 않았는지 시커멓게 속살이 드러난 먹돌을 실은 컨테이너배가 막 파산하고 귀향한 사내처럼 을씨년스럽게 떠있었다.

        무너지면 다시 쌓고 무너지면 다시 쌓아야하는 수천 년 반복되었을 가여운 인간의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람은 장난처럼 바다를 꼬깃꼬깃 구겼다 폈다가. 언덕 위에 훌쩍 올라가서 겨울잠을 자는 꽃씨 풀씨를 흔들어 깨우다가. 고동 줍는 아낙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놓는 수수천 년 반복해오던 일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연은 무자비하기 때문에 위대하다 했던가. 어쩌면 바람은 신의 위대함을 알리는 1급 심부름꾼인지도 모른다. 조은길(시인)

    ▲조은길 시인은 마산에서 태어나 199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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