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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20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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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꽃물 든 발로…

  • 기사입력 : 2005-04-1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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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옥희 시인이 찾은 거창 신원 '노송'

        나지막한 벼랑에 몸 걸친 老松 … 깊은 그늘로 반가이 맞아주고

        눈 앞엔 아스라이 감악산 자락 … 4월의 햇살을 끌어모으는 계곡

        그림같은 산골 통나무집 다락방엔 밤마다 달빛이 꽃발로 기어들겠지


       ▲김옥희 시인은 진주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2004년 ‘시와반시’ 신인상 등단.
     

       아침에 지나 갈 때는 피지 않았던 길가 벚꽃이 저녁에 돌아오다 보니 환하게 피어있다. 꽃나무 아래 일부러 앉지 않아도 세상에서 몰래 그리워한 것들을 들킨 것 같아 가슴이 철렁한다. 국도 59번. 대진 고속도로 산청 인터체인지에서 내려 신원으로 가는 길은 고적하다. 맑은 햇빛 속에 산자락을 돌고 돌아도 차 한 대 스쳐가지 않는 적막한 봄길. 산비탈마다 진달래꽃들이 발자국처럼 피어 있다.

        언젠가 이 길을 지나다 붉은 흙바닥에 뽑혀 내동댕이쳐져 있던 거창양민학살 기념비를 본 적이 있다. 검은 돌에 새긴 짧은 추모의 글도 용납하지 못하던 이념은 세월을 따라 이제 거창사건추모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역사관과 위령비가 세워진 공원으로 향하는 길목에 줄줄이 태극기가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이념이란 이렇게 가볍고 허전한 것이었을까.

        오늘은 사람과 이념을 접어두고 세상의 다른 문을 열고 들어서듯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닦아놓은 거울처럼 깨끗한 산길을 돌아가니 야트막한 언덕 위 아담한 옛집 추녀가 보인다. 차를 세우고 올라갔더니 양지헌(養志軒)이라는 현판이 먼저 보이고. 아름드리 백일홍에 에워 싸인 우천서사(尤川書舍)가 나온다. 이 백일홍 만개하는 여름이면 장관이겠다. 서사 뒤편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보니 임청정(臨淸亭)이라는 운치있는 정자가 나온다. 정자의 주인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임청(臨淸)을 빌려다 풍류를 즐기고 공부를 했던 모양이다.

        임청정은 작은 쪽문이 달린 후원을 거느리고 있다. 말이 후원이지 아무 꾸밈없는 산자락에 수령 5백여년 쯤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소나무 한 그루 그리고 그 소나무 아래 걸터앉음직한 작은 바윗돌 서넛이 전부다. 나지막한 벼랑에 몸을 걸친 그 소나무의 기운과 아름다움이라…. 뿌리는 지수화풍의 세계를 넘어 공으로 뻗고. 움직임 없이 움직이는 것들을 끌어당기면서 가지로는 허공까지 오롯이 품고 있다. 소나무 그늘은 깊고 다정하다.

        그 그늘 아래 앉아 눈을 감자 슬쩍 세상을 비켜서 한 칸 방에 우주를 들여놓고 마루에 앉은 이가 보인다. 그가 무연히 바라보는 하늘이 보이고 발 아래 흐르는 물길이 보이고 외면하지 못했을 저 감악산 산자락이 보인다. 한번쯤 그를 사랑한 기억이 떠오른다. 간절하게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내 안에서 헤매다 무릎이 꺾인 기억이다. 한번도 제대로 그와 마주앉아보지 못했다. 나는 항상 하염없이 흐르고 굽이치고 불려 다니면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을 뿐이다. 내가 균형을 잡고 멈춘 적이 없으니 그는 더욱 침묵했으리라. 그 침묵에 참담했던 시간이 돌아오고 돌아와 꽃으로 피어나는 것을 봄마다 본다.

        한낮의 햇살 아래 문득 나는 백년을 거슬러 떠다니고 있다. 그 또한 나였던가. 나를 기다리는 건 늘 나였던가. 그 또한 오늘. 가던 길 멈추고 살그머니 흙 묻은 발을 들여놓는 나를 보고 있을까.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해보고 있을까. 여전히 육신을 끌고 돌아다니는 나를 측은해할까. 한번쯤은 몰래 손을 내밀기도 했을까.
    정자의 해묵어 갈라터진 기둥에 손을 얹고 넋을 잃었나 보다. 문득 내 손등 위로 무당벌레 한 마리 기어오른다. 배가 고파 온다. 둘러보니 인가 한 채 안 보이는 이 고적한 산골. 흐르는 물가에 그림 같은 통나무집이 한 채 보인다. 가까이 가보자 ‘꽃 피는 산골’이라는 나무 패찰이 붙어 있다. 울도 담도 대문도 없이 조그만 연못 위로 나무다리가 놓여 있고. 만개한 목련이 물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다. 물위에 떠 있는 흰 꽃잎은 처연하다. 몸 없는 그가 어느새 이곳에도 다녀갔던가. 떠내려가지 못하고 맴도는 꽃잎을 한참 바라본다.

        밤이면 달빛을 건너 수달가족이 잉어를 잡아먹으러 이 연못으로 내려온다고 인기척에 마당으로 나온 주인이 웃는다. 카페와 펜션을 겸하는 집이라 한다. 뜨거운 커피 잔을 들고 창 너머로 바라보는 계곡은 기운찬 짐승처럼 4월의 햇살을 끌어 모으고 있다. 저 은밀하게 소용돌이치는 역동을 가슴에 품을 수 있으면 꽤 오랫동안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겠다. 소나무 가지 몰래 흔들리는 봄밤에는 통나무 침대와 넓은 유리창이 있는 이 집 다락방에 진달래 꽃물 든 발바닥으로 달빛이 넘어들어 오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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