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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5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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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

  • 기사입력 : 2005-09-2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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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승훈(정치부 차장대우)

        ◆앞=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00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라 말이냐. 김청음(金淸陰)처럼 통곡하여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기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실린 위암 장지연(1864~1920)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부분이다. 이날 장지연은 체포되어 경무청에 수감되었으며 황성신문의 사원 10명도 체포되었고 신문은 무기 정간을 당했다.

        ◆뒤=채찍 모자 그림자 수레먼지 끼고 오니/ 문·무관 분분히 새로 악수 나누네.//한강의 바람과 연기가 원래 낯이 익으니/ 차가운 매화는 예전처럼 기쁘게 웃으며 맞이하도다.//
        1916년 2월 10일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실린 한시 ‘환영 하세가와(長谷川) 총독’의 번역문이다. 하세가와는 1905년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하고 통감부의 임시통감을 지낸 인물이다. 그 하세가와가 2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오는 것을 축하하는 시다. 하세가와는 총독 취임 후 공포정치와 무단통치를 통해 3·1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李王 전하 동해를 건너시니/ 관민이 길을 쓸고 전송했네.// 오늘 같은 성대한 일은 예전에 드물던 바/ 일선융화(日鮮融化)의 서광이 빛나리라.//
        1918년 1월 1일 매일신보에 ‘대정육년시사(大正六年詩史)’란 제목으로 실린 장지연의 시다. 1917년 6월 순종이 일본왕 대정(大正)을 만나러 간 사실을 소재로 일제 식민통치를 찬양한 내용이다.

         ◆앞은 필자가 오랫동안 학생으로. 사회인으로. 기자로 생활해 오면서 흠모해 오던 애국지사 장지연이다. 뒤는 80년대 이후 일제하 친일행위에 대한 소장학자들의 실증적 연구성과가 누적되면서 드러난 친일시인 장지연이다.
        장지연에 대한 평가가 애국지사에서 친일파로 바뀌고 있다. 인간은 변한다. 감정과 이성. 의지와 현실 사이에서 초라하게 하루에도 몇번이나 마음을 뒤집으며 살아간다. 망한 나라의 가난한 지식인이었던 장지연이 현실 앞에서 비굴해야 했던 모습이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장지연의 묘소가 마산시 현동에 있는 관계로 경남지역 기자들은 해마다 ‘신문의 날’이 되면 묘소를 참배하곤 했다. 그러나 스스로 반성해 본다면 앞의 위암에게 참배했는지 뒤의 위암에 참배했는지 혹은 앞뒤 모두인지 참으로 조심스럽다. 장지연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생활과 상황을 핑계로 글을 팔아먹고는 시치미를 떼고 그의 친일을 논죄하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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