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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100년만에 돌아온 '북관대첩비'

  • 기사입력 : 2005-10-2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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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진숙 논설주간

        오늘은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를 일제(日帝)가 뺏어간지 100년주년 되는 날이다. 이 비는 임진란때 의병들을 이끌고 왜군을 쳐 크게 승리한 정문부(鄭文孚) 장군의 승첩을 기려 숙종이 함경북도 길주에 세운 것으로서 높이 187㎝. 너비 66㎝에 정 장군의 전공을 밝힌 1.500자의 글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이 비석을 발견한 일본군 2사단 17여단장 이께다 소장과 미요시 중장이 그들 선조들의 패전이 기록된 것에 대해 수치로 여기고 귀국하면서 이 비석을 가져가 버렸다.
        처음에는 황실경내에 있었지만 군국주의 전범들의 위패가 보관된 야스쿠니신사 숲속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귀퉁에 옮겨져 지난 20일 우리나라로 돌아올 때까지 그 오랜 세월을 외롭게 버텨냈다. 일제는 본래 이 비석에 씌운 기와집 모양의 지붕을 걷어내고 무거운 자연석 돌을 얹어놓았다. 비석에 담겨있는 한민족 정기를 억누르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 무거운 돌을 머리에 이고도 의연하게 참아낸 북관대첩비야말로 백절불굴(百折不屈)의 한민족 기상을 보여준 것이라고 본다.

        일제는 비석을 옮겨 놓은 후 곁에다 “북관대첩비는 함경도 명천군 임명진에 있었는데 일본이 조선과 전쟁한 사실을 기재하였다. 그 비문에는 대첩(大捷)이라고 하였지만. 그 당시 사실과는 전연상위(全然相違)하니 세인(世人)들은 믿지 말라”는 글을 쓴 목패를 세워 두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비문의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거짓말함으로써 일본인들이 비문을 읽지 말도록 유도하고 설사 읽는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을 믿지 않게 하려는 그들의 치밀한 저의가 느껴진다.
        1592년(선조 25년) 7월25일에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2만2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함흥으로 진격해 함관령 이북 1천리땅을 점령했다. 수령 방백들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성을 버리고 도망가버렸으니 어찌 관군인들 남아있었겠는가. 그때 정문부(鄭文孚) 장군이 의병을 모아 궐기해 피난 와 있던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왜적에게 넘겨준 반도 국경인(鞠景仁)과 국세필(鞠世弼)을 참수하고 명천 일대를 수복하자 당시 고을사람들이 크게 호응해 의병에 지원함으로써 그 수가 6천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정장군은 이들을 이끌고 왜군과 경성(鏡城). 길주(吉州)·장평(長坪). 쌍포(雙浦)·임명(臨溟). 단천(端川). 백탑교(白塔郊) 등지에서 8차례 싸워 모두 크게 이겼다. 이 대승첩을 일러 ‘북관대첩(北關大捷)‘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혁혁한 전공은 조정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승리를 시기한 관리들이 의도적으로 숨기거나 폄하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인조가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해 공주로 피난가면서 그에게 부총관직을 제수했다. 그러나 정장군은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종기 때문에 운신하기 힘들어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다. 그후 ‘박홍구 역모 옥사‘에 연루됐다고 무고당해 무죄임이 밝혀졌음에도 인조반정(仁祖反正) 공신들이 그를 풀어주지 않고 그가 창원부사로 재직하던 당시 지은 초나라 회왕시를 문제삼아 모진 고문을 가했다. 정장군은 1624년(인조 2년) 11월9일. 향연 60세를 일기로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 그가 떠난지 41년만인 1665년(현종 6년)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상소로 진실이 밝혀져 신원이 회복됐고 숙종은 그에게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임진란 종전 111년만인 1709년에 그의 전공을 기려 길주에다 ‘북관대첩비‘를 세웠던 것이다.

        북관대첩비가 돌아오기까지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과 초산스님(한일불교복지회장)이 많은 힘을 쏟았다. 남북 불교계도 힘을 합쳤다. 북관대첩비는 지난 21일 오전 10시 용산국립중앙박물관 나들다리 앞에서 환국했음을 신에게 알리는 고유제(告由祭)를 지냈으며. 박물관 개관일인 오늘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됐다. 대첩비는 남한에 1년정도 머무른 뒤 북한으로 보내 당초 있었던 그 자리에 세울 것이라 한다.

        북관대첩비가 빼앗긴지 100년만에 다시 돌아와 임진란 승첩을 후손들에게 바로 알리고 한민족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게 됐음은 참으로 의미 깊고 다행스런 일이다. 일제(日帝)가 강제로 가져간 우리 문화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번 일을 계기로하여 문화제 반환운동을 꾸준히 펼쳐나가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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