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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황우석과 `집단 최면'

  • 기사입력 : 2006-01-1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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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우석 이야기는 정말 이제 지긋지긋하다. 그래서 듣고 싶지도 않다고 사람들이 말한다. 첨단의 자연과학적 성과에 대해 전 국민이 다같이 전문가가 된 듯이 열광했던. 그리고 그 모두가 거짓임이 밝혀져 이제는 듣고 싶지도 않게 된 황우석 사건은 자연과학적 반성 못지 않은 사회과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황우석 사건이 보여준 우리사회의 ‘집단광기’ 혹은 ‘집단최면’의 가능성은 국민 대다수의 건전한 판단을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우리사회의 근간이 아주 쉽게 흔들릴 수도 있다는 우려를 보여준다. 황우석 신드롬이 극에 달했을 때. 줄기세포 복제의 윤리문제를 거론하는 사람이나. PD수첩의 취재에도 일면의 타당성이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하는 사람은 함께 이 땅에 살 수 없는 사람처럼 매도당했다.

      그러나 서울대의 조사발표와 서울대 총장의 사과성명으로 모든 것이 드러난 지금. 지난 수십일간 우리 주위에서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집단최면’ 상태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든 사회든 조직이든 최면이 걸린 상태에서 한 방향으로 치닫고. 그것을 비판하거나. 벗어나거나. 심지어는 같은 방향이되 달리는 속도가 늦어도 집단왕따를 하는 삶이 우리 주위에 현재하는 것이다. 최면상태에서 한 방향이 옳다고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애국심·애향심·애사심이 인정되는 사회. 비판하는 자에게는 단지 ‘침묵’하는 것만 허용되는 분위기가 있다.

      집단최면에서 깨어나 보면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을까 자신도 이해되지 않는 것을 집단최면 상태에서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최면의 상황이 끝나도 오히려 최면상태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현상마저 보이는 것이다.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일본의 군국주의. 스탈린의 공산주의가 그같은 집단광기의 극을 보여준 것들이다.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현대사의 고비마다 나타난 이데올로기 투쟁이나. 개발독재과정에 나타난 새마을 운동. 영·호남의 정치적 지역주의에서도 이같은 집단최면의 상황이 있다. 직장에서의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집단최면의 가능성은 있으며. 우리가 알게 모르게 주변에서 많은 일들이 일종의 집단최면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것은 그같은 집단최면이 때로는 소수의 의도한 자들에 의해 조작되고 이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많은 정치적 집단광기가 이른바 정치지도자들에 의해 의도된 것들이었으며. 이번 황우석 사건의 경우도 검찰조사를 더 해봐야 알겠지만 소수의 사람이 의도한 거짓에 의해 유발된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집단최면의 상황이 되면 논리가 필요없다. 단지 아우성이 있을 뿐이다.

      황우석 사건에서 정치집단이나 네티즌은 물론이고 언론이나 교육계까지 그같은 집단최면의 확산자 역할을 한 것으로 결과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실린 황우석과 그 황 박사의 온갖 영웅담을 이야기했던 많은 선생님들이 이제 아이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황우석 신드롬이 한창일 때 노무현 대통령이 서울대연구소를 방문하고 정운찬 서울대 총장이 흰 가운을 입고 노 대통령에게 설명하는 장면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청와대도 사과하고. 서울대도 사과했지만 우리사회의 허약한 구조는 여지없이 드러나고 말았다.

      고려청자에 새겨진 연꽃 잎 중 하나는 살짝 들어올려져 나머지 것들과 모양이 달랐다. 그래서 그 청자연적은 더 멋 있다. 집단도 개인도 사고와 논리에 좀 더 여유를 갖는 사회가 아쉽다. 박승훈(정치부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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