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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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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문화] 그 맥을 잇는 사람들 (3) 두석장 김극천씨

  • 기사입력 : 2006-02-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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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길 30년… 쇠붙이에 魂을 담다


      나무의 소박한 결 위에. 화려하나 자연의 멋을 잃지 않은 금속재. 장석(裝錫).(중요무형문화재 64호 두석장 김극천씨가 작업실에서 쇠를 다듬고 있다(위). 아래는 직접 만든 전통가구를 보여주고 있는 김극천씨. 가구 한점을 만드는데 최소 6개월이 걸린다)

      자신과의 외로운 투쟁을 하며 차갑고 질긴 쇠붙이를 오로지 정성스런 손놀림으로 부드럽게 녹이는 두석장(豆錫匠) 김극천(55)씨.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 기능보유자다.

      그를 만나러 찾아 간 통영 명정동의 미로 같은 골목길은 서설 끝의 칼바람까지 몰아쳐 몸을 가누기조차 쉽지 않았다.

      3년여 전.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 소설 배경을 더듬으며 미로 같은 이 골목길을 오르내리기를 수차례. ‘두석장’ 안내 간판과 맞닥뜨린 기억을 되찾아 다시 선 그 골목길은 감회가 새롭다.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 기능보유자 김덕룡(1916~1996년) 살았던 곳’ 이라는 아담한 돌비석이 대문 오른쪽에 세워져 길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있었다.

      김씨의 안내로 좁은 공방에 들어섰을 땐 벽마다 여러 모양의 장석과 방바닥에는 망치. 줄. 정 등과 이름도 생소한 연장들이 널려있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되돌아간 듯했다.

      수천번의 손놀림이 빚어애는 은근한 멋

      나비·태극 등 모양만도 2~3천 가지

      4대째 이어온 家業 쇠락의 길 걷고 있지만

      두석장 이어갈 아들이 있이 든든

      묵묵히 걸어온 장인의 길

      오늘도 그의 고집스런 망치질은 계속된다

      ★망치질 외길인생
      나비 문양 등 금속재 장석(裝錫)은 한낱 부속품에 지나지 않지만 전통가구의 기능과 조형미를 완성시킨다.
      수천번 장인의 손길 끝에 탄생하는 은근한 멋의 장석. 거기엔 장인의 숨결이 배어난다.

      두석장(豆錫匠)은 장롱 등 가구의 이음새나 손잡이. 혹은 자물쇠가 되기도 하는 장석을 만드는 기술자를 말한다. 콩 두(豆)를 쓰는 것은 쇠붙이에 망치질을 할 때 콩콩 튀고. 장석이 콩처럼 노란색이라는 데서 따왔다고 들려준다.

      두석장 김극천씨.

      그는 이 방에서 4대째 망치질을 멈추지 않은 채 쇠붙이에 혼을 불어넣고 있다. 이 분야의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였던 아버지 김덕룡 옹이 지난 96년 81세로 작고하자 대를 이어 가업을 잇게 됐다.

      고교 시절부터 부친을 도와 잔심부름을 하다 1975년 군 제대와 동시에 본격적으로 전수를 받아왔다.
      그 뒤 30년만인 지난 2000년 7월 22일 부친에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 기능 보유자로 지정됐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쉽고 편한 삶을 포기하고 대대로 우리의 전통을 잇기 위해 묵묵히 장인의 길을 걷고 있다.
      제 아무리 두텁고 단단한 쇳조각도 종이처럼 펴고야 마는 인내. 그것이 장인의 근성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잔심부름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재주를 익혔다”며 “배운 재주를 썩히지 말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어 외길을 걸어온 지 30여년.

      “천천히 야무지게 만들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는 그는 전통문화를 이어가는 장인으로서 “작품을 만들 때 잡념이 없어 좋다”며 허허 웃는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오늘까지 명성
      통영의 두석장은 임진왜란 이후 통영에 12공방이 생기면서 성행하기 시작해 오늘까지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김씨 집안의 장석 만들기는 통제영 12공방의 하나였던 두석공방에서 일했던 증조부 때부터 시작됐다.

      거의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 장석은 나비. 태극. 박쥐 등 그 가지 수가 무려 2~3천여 종이나 되는데 장석마다 갖춘 모양이 작으면서 오밀조밀 예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나비장석은 두석장 대대로 손꼽는 통영의 대표적인 장식이다.

      70년대 초. 통영나전칠기 공방이 100여 군데가 넘을 정도로 번창했으며. 80년대까지만 해도 장석만 박아주는 종업원을 둘 정도로 일감도 많고 수입이 괜찮았다.

      그러나 통영 나전칠기가 쇠퇴하면서 생계유지가 어려울 정도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자 김씨는 오동나무와 느티나무로 조화를 이룬 이조가구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애기장. 문갑. 화장대. 반닫이. 궤. 농 등이 그가 만든 전통가구 품목이다. 가구 한 점을 만드는데 최소 6개월 정도 걸린다. 특별한 주문품은 1년이 걸리는 것도 있다.

      요즘처럼 어깨 힘이 빠지는 때도 없다. 전통가구를 찾는 주문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인에게 월 100만원씩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지만 전수생은커녕 배우려는 사람도 없다.

      그는 “두석장의 대가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해 전수생을 두고 싶지만 재정적인 지원이 없으면 힘들 것”이라며 개선책을 바랐다.
      그래도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작업장에서 작품을 만든다.

      젊은 시절. “쇠는 썩지 않는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한 개라도 더 만들어 두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새삼 떠오르기 때문이다.

      “한시도 손을 놀리지 않고 작업장에 앉아 있던 아버지야말로 장인정신을 온 몸으로 보여 주신 것이 아니겠느냐”며 “의심없이 이 길을 걷게 해준 아버지가 고맙다”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5대째 가업(家業) 이을 아들 있어 대견
      김씨는 가업의 맥을 이어갈 작은아들 진환(25) 씨가 있기에 오늘도 열심히 조이질(금·은·동붙이로 만든 물건에 어떤 무늬를 새김)을 한다.
      2남 1녀 중 막내인 진환 씨가 대학에서 공예를 전공. 군복무를 마치고 아버지 뒤를 이어 5대째 가업을 이어갈 준비를 하고 있어 대견스럽다.

      그는 “신세대인 아들이 가구 장식만 할 게 아니라 시대에 맞게 우리의 소중한 전통을 잇겠다는 생각으로 장석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전국 각지에서 통영 장석을 찾는 사람이 있는 한 이 일을 계속할 것이라는 김극천씨.

      “자물통에 상감 넣는 기술이 아직 모자란다”는 그는 “평생 죽을 때까지 좋은 작품 만드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손이 성할 날이 없지만 손길이 한 번 더 갈수록 견고해지고 빛을 발하는 장석들을 보며 그는 좀체 손놀림을 쉬지 않는다.

      오늘도 그는 조상들의 숨결을 느끼며 네 평의 좁은 작업장에서 작은 쇠붙이에 혼을 불어넣고 있다. 김다숙기자 ds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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