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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등록문화재 (3)서북부권-진주·산청

  • 기사입력 : 2007-01-18 09: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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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담 켜켜이 '전통의 기억'


    진주시는 진주성인 읍성을 중심으로 본성동. 중앙동. 옥봉동 등이 조선시대 도시 형태를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전통도시의 형태를 잘 갖추고 있다.

    과거 초가집과 기와집이 벽돌이나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고 건물 높이가 올라갔을 뿐 시가지의 형태와 지리. 구조는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평거동과 도동 등 경작지가 개발돼 신도시를 형성한 것 또한 신·구 도심을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사례다.

    지리산을 비롯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산청은 덕천강. 경호강이 유유히 흘러 남강을 이룬다.

    이곳에는 대원사계곡과 내원사계곡. 선유동계곡. 중산리계곡. 고운동계곡. 거림계곡 등 수많은 계곡이 있다. 이 중 백운동계곡은 조선시대 은거 처사였던 남명 조식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전통의 고장이다.

    ▲진주 문산성당(진주시 문산읍 소문리 58-1 외 5필지)

    일제강점기와 광복. 6·25전쟁을 거치면서 교회의 기능뿐 아니라 신교육의 장으로 역할을 했던 문산성당은 1905년 5월 소촌공소(공소:본당보다 작은 교회 단위)에서 성당으로 승격한 서부경남지역 최초의 본당 성당이다.

    초기에는 살림집을 수리해 본당으로 사용하다가 1923년 전통 한옥 형식으로 본당을 건립했고. 1937년 현재의 바실리카식 본당을 건립했다.

    보수적이었던 진주의 특성 때문에 곧바로 진주읍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외곽에서부터 포교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시대상황을 보여준다.

    성당 건물을 한옥으로 지었다는 것이 특징이며. 국내에 몇 안되는 한옥 성당이다. 현재 예배당과 강당 등이 과거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문산성당이 자리한 곳은 문산역의 찰방 관아였던 곳으로. 선교사가 찰방 관아를 포교당으로 활용하면서 성당으로 자리잡게 됐다.

    한식과 양식의 신·구 본당이 경내에 공존함으로써 성당 건축의 토착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당시 민중들이 이해한 서양식 건축양식을 지역 건축시공 여건에 맞게 해석해 건축한 건물이다.

    ▲진주 하촌동 남인수 생가(진주시 하촌동 194-1)

    1915년 건립될 당시 일반 농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위채와 아래채로 구분된 현재 모습은 남인수(본명 강문수) 본인이 살았을 때의 것이 아니며. 이곳에 남인수가 살았다는데 의미를 둔다.

    진주시는 아래채를 남인수 기념관으로 활용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시민·사회단체가 남인수의 친일행적 문제를 제기함에 따라 백지화됐다.

    1936년 ‘눈물의 해협’을 취입한 이후 30여년 동안 최고 가수로 활약했던 남인수는 ‘애수의 소야곡’. ‘가거라 삼팔선’.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삶의 애환을 노래한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진주 옥봉성당(진주시 옥봉동 443)

    1911년 진주 문산성당의 옥봉공소로 출발. 신도들의 공력을 모아 1933년 성당으로 건립됐다.

    진주지역 천주교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성당이며. 지금까지 예배당 등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여러 차례 증축을 해 건립 당시에 비해 규모는 커졌지만. 초기 건물의 간략한 로마네스크 양식이 잘 남아 있다.

    또한 근·현대기 성당건축의 성장과 변천과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진주 진주역 차량정비고(진주시 강남동 245)

    경남선 개통과 함께 1925년께 건립된 진주역 차량정비고는 당시 진주가 서부경남의 인적·물적 수송의 중심지였음을 증명하는 건물이다.

    왕대공트러스의 변형. 2개의 반복된 아치형태. 트러스 간격마다 설치된 벽돌부벽. 벽돌내 쌓기한 지붕처마 부분의 홈통처리 등은 건축적 미와 기법을 세련되게 구사하고 있어 철도사적 가치가 있다.

    건물은 과거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지금은 건물이 노후화돼 특별히 사용은 않고 있다.

    ▲산청 금서면 민재호 가옥(산청군 금서면 특리 1031)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정주 군수를 지낸 민재호의 가옥은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중층의 목조주택이다.

    1930년 건립돼 현재 여흥 민씨 일가에서 보존하고 있다.

    한 동이 1·2층으로 되어 있으며 2층의 천장 높이도 2m를 넘는다. 전통 목조구조 양식에다 다다미 등 일본식 가구 수법이 혼합돼 있으며 실용적인 평면 구성과 2층이 누마루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흙을 구어 만든 독특한 형태의 굴뚝이 있었으나. 지난해 11월 굴뚝이 도난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기도 했다.

    ▲산청 단계마을 옛 담장(산청군 신등면 단계리 556-1 등)

    예부터 단계(丹溪)가 있는 신등면은 ‘등 따습고 배부른 마을’로 손꼽혔으며. 유명한 ‘산청쌀’이 지금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자연히 세도가와 부농이 모여 살아 인물이 많이 난 마을이다.

    마을의 규모도 커서 500여 가구가 지금도 살고 있다. 동단. 서단. 남단. 북단으로 마을을 나누고 있으며. 이 중 서단과 북단. 동단 일부가 등록문화재에 포함됐다.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보면 담장의 꼭대기에 올린 기와 바로 밑에 판석을 깔아 기와의 흘러내림을 방지. 안정감을 준 것이 특징이다. 또한 고성 학동마을이 넙적돌을 사용했다면 단계마을은 주변 하천의 둥근 강돌을 사용했다.

    담장은 돌담과 토석담이 혼재되어 있으며 높이 2m 정도로 높은 편이다.

    담의 하부 2~3척 정도는 방형에 가까운 큰 돌로 진흙을 사용하지 않고 메쌓기 방식으로 쌓았으며. 그 위에는 하부에 사용한 돌보다 작은 돌을 사용하여 진흙과 교대로 쌓아 올렸다.

    마을의 형국이 배(舟) 모양이어서 예부터 물이 밀려와 수해를 자주 입었는데. 마을 주민들이 돛대와 삿대가 없기 때문이라 여겨 가까이 있는 고목나무에 돛대와 삿대를 걸쳐두니 수해가 사라졌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마을 내 전통주택들은 조선후기에서 근대에 이르는 시기에 건립된 부농주택으로 규모가 크고 권위적이며. 시도민속자료 제4호 ‘단계박씨고가’가 정점을 이루고 있다.

    다만 198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담장보수를 실시했는데 원형이 많이 훼손됐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산청 남사마을 옛 담장(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253 등)

    과거 담장은 가세를 외부에 알리고 식솔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더 높은 담장을 쌓아 집안의 권세를 자랑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특히 남사마을에는 출중한 선비가 많아 고려시대 이후 대과 급제자만 57명이 나왔다고 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마을내 최씨고가와 이씨고가. 사양정사. 이사재 주위는 토담이 잘 남아 있으며. 마을 안 서민들이 거주하는 민가에는 돌담이 많이 사용돼 전통사회의 신분에 따른 담의 구조와 재료. 형식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상류층의 건축물 주위에 쌓은 토담은 대개 메쌓기한 석축 위에 찰쌓기 방식으로 쌓은 것이다. 토담 하부에 길이 50~60cm 정도의 큰 막돌을 2~3층 메쌓기 한 후 그 위에 황토를 편 다음 막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벌려 놓고 돌 사이에 황토를 채워 넣어 쌓은 것이다.

    담 상부에는 전통 한식기와 또는 일식(日式) 평기와를 얹어 우수(雨水)로 인해 담이 붕괴되지 않게 했다.

    남사마을의 묵은 토담과 돌담은 마을 주민들이 남사천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강돌을 사용해 주택 외곽과 밭 주위에 쌓은 것으로. 서부 경남지방 빈촌의 전통적인 공간구조와 담장형식. 구조를 잘 보여준다.

    박영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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