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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대에 `눈물도 마른' 사명대사비...

  • 기사입력 : 2007-09-19 09: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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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원박물대학생 해인사 답사 동행기

    일제 때 네 동강 난 후 `시멘트 땜질'로 복구해 세워

    농산정 옆 최치원 시석은 차량통행 여파로 균열 생겨


    창원문화원이 운영하는 창원박물대학 제33기 수강생 80여명이 지난 14일 합천 해인사를 찾아 신라말 대학자 고운 최치원 선생의 은둔지와 사명대사비와 부도. 진성여왕과 각간 위홍의 사랑이 깃든 원당암과 비로자나불 등을 답사했다.

    답사팀은 먼저 해인사 입구. 고운 최치원(857~?·신라말 대학자) 선생의 말년 은둔 수도처인 농산정(籠山亭)을 찾았다. 정면·측면 각 2칸 규모의 정방형 목조기와로 지어진 단아한 정자 바로 아래로 흐르는 계곡물이 너무 우렁차 지척에 있는 사람 소리가 잘 분간되지 않는다.

    고운 선생은 이곳에서 난세에 벼슬을 버리고 은둔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칠언절구 ‘둔세시(遁世詩: 탈속의 소회를 적은 시)’로 읊고. 정자 건너편 도로 위 반평 남짓한 시석(詩石)에 남겼다고 한다.
    ‘광분첩석 후중만(狂噴疊石 吼重巒)/인어난분 지척간(人語難分 咫尺間)/상공시비 성도이(常恐是非 聲到耳)/고교유수 진농산(故敎流水 盡籠山).

    고려시대 파한집을 쓴 이인로(1152~1220)는 훗날 고운의 둔세시를 이렇게 전했다.
    ‘흘러내린 계곡수가 포개진 바위에서 미친 듯 뿜어내니 사람들의 말소리를 지척에서 분간키 어렵도다. 아마도 이는 세상사 시비(是非)소리가 내 귀에 이를까 저어해 일부러 유수를 시켜 산을 돌게 한 것인가 보다.’

    그러나 고운의 시석은 신작로가 생기면서 사찰을 드나드는 자동차의 소음·진동으로 균열이 시작돼 보존대책이 시급하다고 했다.

    인솔한 박동백 창원문화원장은 “시석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이대로 방치하면 10년이 못가 손이 들어갈 정도의 틈이 생길 것”이라며 “하루빨리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소중한 역사의 흔적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해인사에는 이밖에도 진성여왕 9년(895) 전후 7년 전란 때 생명을 잃은 중생을 공양하기 위한 묘길상탑(妙吉祥塔). 진성여왕과 각간 위홍의 사랑 얘기가 깃든 원당암(願當庵)과 비로자나쌍불 등이 있어 답사생들은 잠시도 집중력이 흐뜨러지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해인사 일주문 아래 왼쪽 홍제암(弘濟庵)이 단연 관심을 끌었다. 이 암자는 사명대사(1544~1610)가 임란 승병의 공을 인정받아 선조 하사로 1608년 창건했는데. 그의 시호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를 따서 이름지었다고 한다.

    홍제암 오른쪽에는 1612년 허균이 쓴 사명대사 일대기 비석이 섰는데. 일제 때 네 동강 낸 것을 시멘트 땜질로 응급 복원해 놓아 눈에 거슬렸다.
    박 원장은 “일제 통치기인 1943년 합천경찰서장 다케우라(竹浦)가 홍제암 사명대사비에서 눈물이 흐르고 일본 패망이 닥쳤다는 민심이 광범하게 퍼져나가자 당황해 비석을 4조각 내 정원 디딤돌로 사용하는 무례를 저질렀다”면서 “응급수리해 다시 세운 이후에는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홍제암 뒷산에는 사명대사가 1610년 입적한 후 사리를 수습해 봉안. 석종형의 부도(浮屠)를 세우고 현재에 이르고 있으나 진입로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아 접근이 쉽지 않았다.

    박 원장은 “절체절명의 민족 존망 상황에서 승병을 일으키고 왜병과 담판을 통해 적을 물리친 큰스님에 대한 대접치고는 너무 소홀한 측면이 없지 않다” 면서 “비석 원상복원과 부도탑 주변 정화 등 성역화 작업이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목기자 sm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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