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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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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내 어릴 적 명절 - 서명옥(소설가)

  • 기사입력 : 2008-09-1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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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고향 궁항리는 지리산 청학동에서 1시간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어린 시절 새총을 쏘느라 혹은 산나물을 뜯느라 하루 종일 온 산을 누비고 다니노라면 길게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내들을 만나곤 했는데 지금은 그들이 청학동 사람들임을 알지만 그때만 해도 나와 동무들은 한낮에 산도깨비라도 만난 것처럼 고함을 지르며 무르팍이 깨지는 줄도 모르고 줄행랑을 놓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허한 웃음만 나오지만 그때는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어쨌든 지리산 구석구석에는 보일 듯 말 듯한 촌락들이 새 둥지처럼 자리 잡고 있었고 우리 집도 그 둥지 중의 하나였다.

    논밭이 귀했던 그 골짜기에서 소작농으로 계셨던 부모님은 여기서는 도저히 잘 살아볼 희망이 없다며 어린 나를 할머니 손에 맡겨 놓고 인근 도시로 돈을 벌러 나가셨다. 다행히 나는 부모님이 옆에 안 계셔도 늘 씩씩했고 고무줄뛰기도 선수였으며 공부도 제법 잘해서 1등을 도맡아 하곤 했지만 밤이 되면 객지에 나가 계시는 부모님과 형제들이 그리워 할머니 몰래 자주 홀짝거렸다.

    그런 부모님과 형제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은 1년에 딱 두 번이었는데 그 날이 명절날이었다.

    한 장짜리 새마을 달력을 받아 든 날이면 제일 먼저 추석과 설날이 언제인지부터 확인했고 명절날 빨간 날이 많으면 저절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명절날이 되어서 부모님이 오시는 날이 되면 나는 아침부터 꽤 바빴던 것 같다. 손톱 밑에 까맣게 낀 때를 없애느라 큰 가위로 손톱을 잘라야 했고 이와 서캐가 득실거리는 머리를 정리하느라 참빗을 들고 진땀을 빼야 했으며 해진 옷들을 죄다 꺼내 놓고 그 중 제일 나은 것을 고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하루에 한 대씩 들어오는 버스가 올 시간이 되면 나는 1시간 전부터 버스가 서는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막상 부모님과 형제들을 만난다는 사실이 너무 좋기도 하고 너무 부끄럽기도 해서 감히 나서 있지도 못한 채 나무 뒤에 숨어서 그들을 기다렸다.

    아버지가 내리고 언니들이 내리고 엄마가 마지막으로 버스에서 내리면 나는 더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빨갛게 익은 고추처럼 타 들어갔고 입안도 말라서 숨이 턱턱 막혔다.

    빨리 달려가서 엄마 품에 안기고 싶은데, 빨리 달려가서 언니들을 불러보고 싶은데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나는 자꾸만 더 숨기만 했다. 그들이 나를 알아보고 불러줬을 때 왜 나는 울었던 걸까. 지금도 나는 그 감정이 기쁨이었는지 서러움이었는지 부끄러움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부모님 품에서, 언니들 품에서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는 아직도 생생하다.

    명절이 되어서 헤어져 있던 가족들을 만나는 기쁨도 컸지만 그 기쁨 못지않게 새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기쁨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파란 바탕에 두 줄의 흰 줄무늬가 세로로 새겨진 체육복. 그리고 얼핏 실내화 같기도 했던 민무늬 운동화. 그것들이 너무 좋아서 이른 새벽부터 온 동네 구석구석을 훑고 다녔던 그때. 그렇게 신나게 동네 몇 바퀴를 돌고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형제들은 이미 첫차를 타고 떠나버렸던, 정말 서러웠던 그 시절. 내 어린 날의 명절은 그렇게 가슴 터질 듯 행복한 날이었다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증발해버린 것처럼 슬퍼지는 날이기도 했다.

    달이 점점 차오른다. 요즘 삶이 너무 팍팍해져서 다들 한가위 달이 살이 찌는 줄도 모르고 있다. 그렇지만 고향에서는 야물고 둥글어져가는 달과 함께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들이 차오르고 있을 것이고, 어딘가에 남겨진 사람들은 혹은 떠나온 사람들은 그리움으로 마음이 차오를 것이다.

    고향을 떠나온 지 벌써 30여년이 다 되어간다. 명절만 되면 내 마음은 벌써 고향집 사립문을 열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버린다. 그렇게 기쁨과 슬픔이 공존해 있던 아련한 시절이 지금도 그리운 이유는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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