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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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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칼럼] 네가 희망이어라

김정훈 신부(천주교 마산교구 청소년국장)

  • 기사입력 : 2009-02-1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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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어보자.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 수도 또 범국가적 차원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말이다. 희망을 물어보는 것조차 때로는 사치라고 느껴진다면 너무 절망적인 이야기일까? 진정 삶을 성실히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을 억지로라도 붙들지 않고는 못사는 세상이 되었기에 더 그렇다. 그냥저냥 대충대충 들어서 좋은 말쯤으로 희망을 노래하고 말하고 싶지 않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위주로 산다. 부모가 제 자식 위하는 마음이 이 세상에서 제일로 크다 한다. 거의 맞는 이야기이지만 자식보다 먼저 제 살을 챙길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 아닌가? 가족은 우리 모두의 희망인가? 불완전한 부모들,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애착을 버리지 못한 부모들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정말 절망을 겪어보지 않은 이가 말하는 희망이라는 것처럼 뜬구름 잡는 것이 없다. 적당한 자기 연민 속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라 내몰릴 대로 내몰린 사람만이 어쩔 수 없이 노래하는 희망을, 어찌 절망을 지나보지 않은 이가 알 수 있겠는가?

    살아가는 일처럼, 아니 살아야 하는 일처럼 잔인한 일도 없다. 미워하는 사람을 제대로 미워하지도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일은 얼마나 잔인한가? 미워해야 할 능력도 없어 그냥 속으로 삭여야만 하는 삶은 얼마나 잔인한가?

    그렇지만 말이다. 정말 절망해보고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이야말로 희망이다. 그 잔인한 삶 안에서도 조그마한 행복을 찾는 치열한 몸짓이 바로 희망이다.

    박노해라는 시인이 있다. 시인으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절망의 시간을 소리없이 숨죽여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잊혀져 가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감옥에 있다 나와서 발표한 시가 ‘다시’라는 시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만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 이의 모습이 보인다. 다시, 그래 누구나 다시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은가? 만약 이 글을 읽는 누구라도 그가 오늘 절망에 있다면, 그러나 절망에서 몸부림치고 있다면 당신은 희망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기에 오늘이 희망이다.

    청소년들과 함께 안나푸르나를 등반하러 간 적이 있다. 어떤 이가 그때 이렇게 말하더라. “신부님, 죽어도 못 올라가겠어요.” 그럴 만도 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오르는 그 높은 곳을 며칠째 걷고 있으니 죽을 만도 하겠지. 끝도 알 수 없고. 그때 이렇게 대답한 기억이 있다. “그래, 죽어라. 올라가다가 죽으면 내가 니 시체라도 업고 갈 테니까, 넌 죽을 각오로 걷고.” 그 친구는 결국 원하는 곳까지 올라갔다. 살아서 말이다.

    그는 그곳에서 희망을 보았다. 자기 자신의 희망을 말이다. 그리고 그는 그 죽을 각오로 살았기에 참으로 희망이 되었다.

    당신이 더 지독한 고통을 겪었고 더 지옥의 삶을 살았기에 당신의 삶은 우리 모두에겐 참으로 희망이다.

    “네가 희망이 되어라.”

    김정훈 신부(천주교 마산교구 청소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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