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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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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이젠 안녕이라고?- 이서린(시인)

  • 기사입력 : 2010-09-0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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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다. 속절없이 떠난다. 질리도록 오래오래 머물 것 같더니 기어이 등을 돌린다. 그리 못살게 굴다가 떠나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이 서운함은 뭔가. 마음 저 아래 시큰한 이것은 무엇인가. 무릇 헤어짐이란, 안녕하고 돌아서는 것이란 애틋함을 남기는 것. 풀벌레 우는 마당을, 마악 끓인 커피를 마시며 내다본다. 잘 가라. 남들은 지독하다, 지겹다 해도 나는 너와 함께 한 시간이 즐거웠다. 잘 가라. 부디 안녕하시길.

    뜨거웠다. 말 그대로 전국이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이런 더위는 처음이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아니어도 모두 지독한 더위에 어쩔 줄을 몰랐다. 오랜만에 만나면 안부를 묻는 인사가 더위에 잘 지내시냐였고, 친구들끼리도 야, 더위에 안 죽고 살았냐 하는 농담을 건넬 정도였다.

    더워서 못 살겠다는 말이 여기저기 들렸다. 여름이 당연히 덥지 하며 덥다는 말을 아끼는 사람도 있지만 여름에 덥다 안 하면 언제 덥다는 말을 하겠는가. 그러려니 하고 묵묵히 참는 것도 좋지만 여름엔 덥다 하고 겨울엔 춥다 하는 게 계절에 대한 도리 아니겠는가. 지는 한껏 열을 내는데 덥단 말을 하지 않으면 여름이 섭섭지 않겠는가.

    마당에 키우는 개 두 마리 중에 한 마리가 무척 촐싹대는 편이다. 오두방정은 혼자 다 떠는데 그래도 무척 귀엽게 생겼다. 그런데 요놈이 더위를 먹었는지 영 힘이 없어 저러다 혹 탈이 날까 봐 식구들끼리 걱정을 하였다. 물을 뿌려주고 차가운 우유에 얼음도 타 주고 하는데 식욕이 없어 굶기를 예사로 한다. 혀를 있는 데로 빼고 할딱거리는 모습이 안쓰럽다. 하긴 저런 털옷을 입고 있는데 어찌 힘들지 않을까.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지 않은가. 우리 모두를 널브러지게 만들던 여름도 절기 앞에선 조용히, 한 발씩 물러나고 있다.

    처서 지나서부터 밤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풀벌레가 운다. 온도계의 눈금도 한 2도 정도 내려갔다. 그러다가 태풍이 지나간 아침, 이건 완전 가을 냄새가 난다. 태풍 곤파스가 지나고 월이와 달이(우리 집 개 이름)를 보니 녀석들 이젠 좀 살 것 같다는 눈치다. 제발 밥 좀 먹어라, 하고 한마디 해본다.

    새삼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제 아무리 날뛰어도 시간은 가고 여름도 간다. 초복, 중복, 말복, 입추, 처서 지나면 벌써 풀냄새가 다르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딱, 처서가 되니 귀뚜라미, 찌르레기가 운다. 벌써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나를 당황케 하는 귀뚜라미의 예측불허 뜀박질이 신경 쓰인다. 자고 있는데 내 얼굴에 폴짝 하고 오르면,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 녀석이 무서운 게 아니라 무방비 상태에서 당하면 기겁을 하게 마련이다.

    시골생활 십여 년이 다 되어 가지만 그런 상황은 쉽게 적응이 안 된다. 풍뎅이와 개구리도 마찬가지다. 언제 어디에서 나를 괴롭힐지 모르는 녀석들이다.

    천년만년 살고 싶어 했던 진시황도 죽었다. 영원히 변치 말자던 연인들도 헤어진다. 태양이 아무리 뜨거워도 밤은 온다.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올 여름도 떠날 채비를 한다. 만나고 헤어지고, 또 다음을 기약하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자연은 어김없다.

    여름을 좋아했다. 사막을 꿈꾸어 온 지 오래 되었기에 태양에 머릿속을 하얗게 태워 보고 싶었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듯 그렇게 여름을 지나고 있다. 이제 마악 우리나라를 벗어난 태풍 곤파스. 책상 앞에 앉았다가 잠시 밖을 내다보니 저기, 무릉산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구월. 마당 수돗가 옆 무화과가 익어가고 있다. 초록 잎사귀에 노란 물이 스민다. 여름이 간다.

    이서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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