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5월 01일 (수)
전체메뉴

[사람의 향기] KTX 기장 박경식씨

희로애락 사연을 싣고 오늘도 인생길을 달립니다

  • 기사입력 : 2010-12-20 00:00:00
  •   
  • 최신 열차 KTX산천 운전실에 앉은 박경식 기장. 이 좁은 공간에서 그는 30여 년을 한결같이 기차와 함께 살아왔다.

    박경식 기장이 마산역에 정차돼 있는 최신 고속열차 KTX산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역시 사람은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눠봐야 알 수 있다는 말을 실감했다. 현역 기관사 중 대한민국에서 단 2명뿐인 200만km 무사고 운행 기록. 대기록을 가진 박경식(53) KTX 기장은 베테랑 기관사의 모습뿐 아니라 너무도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지금은 한국철도공사 부산경남본부 부산고속철도기관차승무사업소 소속으로 부산으로 출퇴근하고 있지만, KTX 기장이 되기 전까지 20년 넘게 생활해 온 마산역에서는 모두가 박 기장을 반갑게 맞았다. 지난 16일 마산역에 정차된 최신열차 KTX산천에서 박 기장을 만났다.

    ◆지구 50바퀴를 달린 사람

    2009년 4월 1일 서울을 출발한 KTX열차가 오후 4시13분 부산에 도착했다. KTX 기장 박경식씨가 무사고 200만km 운행기록을 달성한 순간이다. 지구 약 50바퀴, 서울~부산 왕복 2500회 오가는 거리를 운행한 셈이다.

    박경식 기장이 철도와 인연을 맺은 지 33년, 그중 기관사 근무 경력만 23년이 넘는 베테랑이다. 1976년 마산기관차사무소 부기관사로 코레일에 입사했고, 1985년 기관사가 됐다. 지난 2004년 1월 부산고속철도기관차승무사업소에서 KTX 기장으로 임명받았다.

    “어렸을 때는 애들 가르치고 싶었는데, 공부는 하고 싶고, 집안은 형편이 어려웠죠. 철도고등학교는 학비도 국비로 부담하고, 숙식 제공도 되니까 선택했습니다.”

    KTX 개통 전 오송에서 시운전을 맡은 기관사도 그였다. 베테랑 기관사 중에서는 대를 이어 기관사가 되거나 가족 중에 철도공무원이 많은데 박 기장은 아무런 연고도 없었지만 지금은 동료들의 존경을 받는 기관사가 됐다.

    30여 년간 수많은 열차를 운전했다. “KTX 지원할 당시에는 주변 동료들이 또 새로운 것을 왜 하느냐고 말리기도 했죠.”

    처음 KTX 기장을 선발할 때 경쟁률이 5대 1이었다. 기관사 경력 10년 이상, 무사고 40만km 이상이 최소 기준이다.

    “호기 좋게 시작했지만 밀폐된 공간 외부소음도 없고, 훈련과정이 힘들었습니다. 그때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고속열차를 개통하는 때인지라 차량과 선로, 신호기 등을 동시에 점검해야 했고, 하루빨리 운행에 들어가야 한다는 압박도 있었습니다.”

    ◆철도 역사의 산 증인

    “1976년 처음 기관조사(현재의 부기관사)로 입사했을 때는 증기기관차를 탔습니다. 당시 부산과 익산, 대전, 서울 등에서 운행했고, 그해 말 증기기관차가 디젤기관차로 바뀌었죠.”

    기관사로 승진하면서 처음 탄 열차는 디젤기관차였다.

    “ARCO라는 열차를 몰았죠. 한국전쟁 때 미군이 전쟁물자 수송용 디젤기관차를 처음 도입했는데, 이것을 인수받은 것이었죠. 석탄이 아닌 경유를 연료로 썼지만 매연이 심해서 거의 증기기관차 수준이었죠. 그때는 운전실이 독립된 공간도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그가 몰았던 기관차 종류는 곧 우리나라가 도입한 기관차 종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진해에선 통제부 군속 통근열차로 쓰인 커민스동차가 다녔죠. 니가타 동차(DEC), CDC, NDC, PP에 이어 KTX와 현재의 KTX산천까지 그러고 보니 참 많이도 탔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아는 기차의 종류라고는 KTX, 새마을호, 무궁화호, 통일호, 비둘기호 정도인데 기관차 종류가 그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

    기관차뿐 아니다. 경전선(경상도~전라도), 임항선(마산~마산항), 행암선(진해 지선), 진해선(마산~진해), 진삼선(진주~삼천포), 경부선 등을 운행했다. 북한으로 이어져 있는 경의선도 운행했다고 한다.

    ◆희로애락선

    진삼선은 사천공항에 화물을 실어나르고, 통근열차 역할을 했다.

    “지금은 귀한 생선이 됐지만 당시 삼천포에는 널린 게 쥐고기(쥐치)였죠. 아줌마들이 말린 쥐고기를 광주리에 들고 열차 객실에서 팔러다녔죠. 뭐라고 하면 같이 먹고살아야지 하며 버티던 생각이 납니다.”

    “입영열차도 많이 몰았죠. 아가씨들은 움직이는 열차가 아쉬워 플랫폼을 따라오고, 부모님들은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들고, 추억이 새롭죠. 얘기를 하지 않으면 다 기억해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과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지나간 시간은 대부분 좋은 기억만 남게 마련이지만 그에게는 평생 잊혀지지 않는 순간이 있다.

    “우리는 핸들이 없습니다. 발견해도 세울 수가 없죠.”

    충북 옥천 부근이었다. 철길 옆으로 개울이 흘러 빨래터로 이용되는 곳이었고, 지금처럼 철길건널목 안전상황이 좋지도 않았다. 남자아이가 세발자전거 앞에 타고, 동생인 여자아이가 뒤에 탔다. 빨래터에 나온 엄마를 따라 나온 아이들이었다. 기차는 그때나 지금이나 신기한 것이어서 아이들은 기차가 지나갈 때 손을 흔들어 대곤 했다. 그런데 자전거 바퀴가 선로에 끼인 것이었다.

    “손을 흔드는데 방법이 없었어요. 내가 왜 이 직장을 택했나 제일 후회가 됐던 순간입니다. 업보인가 싶기도 하고….” 그렇게 박 기장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박 기장이 틈틈이 써 온 시작 노트를 보며 옛 추억을 떠올린다.

    ◆문학중년

    지난 2007년 열린 철도문화공모전에서 박 기장은 문예부문 금상을 받았다. 그해 서울역 오픈 콘서트 홀에서 직접 수상시 ‘고향 가는 길’을 낭송하기도 했다.

    ‘고향 가는 길’은 어릴 적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가면서 느꼈던 감상을 표현한 작품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수많은 사람들을 고향에 데려다 주고, 3시간이면 전국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정작 그 자신에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 고향길이었던 것이다.

    철길을 따라 달리는 은빛 실타래

    굽이치는 모퉁이마다

    하얀 추억이 포말로 부서지고

    막 겨울잠에서 깬 개구리들이

    양지녘에 모여

    햇살들과 한담을 즐기고 있다

    북풍에 등 떠밀려 온 철새는

    날개를 폈다 접었다 마름질을 하며

    북녘으로의 긴 여행을 준비하고

    강변엔

    촉촉이 눈물을 머금은 수목들과 하늘이

    구름을 데리고 전송을 나와 있다

    작년에도 그랬듯이

    낙동강의 봄은

    늘 떠남의 빈자리에

    연두 빛 설레임을 채우며

    종종걸음으로 다가온다

    경부선 원동역의 봄 느낌을 묘사한 박 기장의 자작시 <낙동강의 봄>이다. 원동역은 봄의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역 중의 한 곳이다.

    마산역에 근무하는 변관석 과장은 “책 많이 읽는 줄은 알았어도 시를 쓰는 줄은 몰랐다”며 “요즘은 바빠서 잘 못쓰는 것 같지만 다른 공모전에도 작품을 내고 꾸준히 작품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정규대학 국문과에 합격했지만, 형편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기관사로 나섰지만 미련은 계속 남았다. 그러다 90년도에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과에 입학해 졸업까지 했다. “국문학 가르치고 싶은 게 꿈이었기에 문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소년동아일보에 시가 당선돼 실리기도 했을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교지도 만들고 문예반 활동도 했다. 본격적인 문학도가 되진 못했어도 꾸준히 시를 지었다. 살아가면서 다양한 작품을 썼지만 직업이 직업인지라 열차와 간이역에 대한 시도 많다.

    “목포행 야간 보통급행열차를 몰던 시절. 지금은 간이역이 된 하동군 양보역을 지나며 느낀 것을 시로 옮기기도 했죠. 객기로 신춘문예에 응모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나만의 글쓰기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한 사람

    경찰서 유치장에 간 적이 있다. 94년 철도노조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앞장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온화한 성품인 그가 나선 것은 열악한 근무환경에 처해 있는 동료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부산사업소 봉사단체 ‘어울림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매달 회비를 내서 정기적으로 소년소녀가장이나 독거노인 등 불우이웃을 방문한다. 회원 중에서도 가장 열심히 참여하는 그는 2년 전부터 회장직을 맡아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가 개인적으로 하는 봉사활동도 있다. 박 기장은 시간이 나면 진영 봉하마을을 찾는다. 누가 불러서도 아니고 시켜서도 아니다.

    “그냥 봉하마을에 발길이 닿아요. 사람이 많이 오니 조금 더 어지러울 것이고, 그냥 청소도 하고, 후원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반평생을 몸담은 철도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다.

    “KTX가 참 편리하죠. 그러나 교통약자들에게는 어쩌면 더 불편해진 게 아닐까하는 걱정도 듭니다. 비싸고, 안내하는 사람도 적고, 스스로 모든 것을 해야 하니 말이죠.” KTX에는 기장, 열차팀장(객실안내), 여승무원 2명 등 총 4명이 근무한다.

    “KTX뿐 아니라 서민을 위해 무궁화호도 계속 운행해야 합니다. 수익만 따져서는 안되는 것들도 있죠.”

    문득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태웠는지가 궁금했다.

    “글쎄요 얼마나 될까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기장이라는 직업은 승객들을 잘 볼 수가 없습니다. 운전실에 홀로 앉아 앞만 보고 운전을 하는 것이 어쩌면 제 취미인 마라톤과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각자 사연을 안고 기차에 오르는 승객들이 저는 좋습니다. 사람들에게 추억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자리가 좋습니다.”

    글·사진=차상호기자 cha83@knnews.co.kr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차상호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