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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윤기섭, 사직서 '눈길'

"원래 무능해서"…겸손한 자필 사직서

  • 기사입력 : 2011-01-07 08: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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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직자들의 비리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독립운동가이자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규운(虯雲) 윤기섭 선생의 지극히 겸손한 자필 사직서가 공개돼 화제다.

    국회도서관은 1층 로비에 윤기섭 선생이 1934년 8월18일 국무위원직을 그만두며 당시 임시의정원 의장이던 손병조 선생에게 직접 손으로 써 제출한 사직서를 전시하고 있다.

    윤 선생은 사직서에서 '이 사람은 원래 무능한 바탕으로 정부의 중책을 감당할 수 없는데다 그 자리가 비어서 할 수 없이 있었다'며 '그동안 지내온지 한 해가 가깝도록 아무 공이 없을 뿐 아니라 하루라도 더 있는 것이 하루의 죄를 더 짓는 것으로 느껴져 견디기 어려워 사임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사직서만 보면 그가 무척이나 무능하고 한심한 인물로 느껴지지만 사실은 겨레의 계몽과 인권신장, 민족의 독립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항일투사였다.

    1887년 4월4일 파주시 파평면 마산리에서 부친 윤기영의 차남으로 태어난 윤기섭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 후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심하고 1911년 이회영·이시영·이동녕 등과 간도로 망명,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윤 선생은 신흥학교 설립 후 학감과 교장을 지내는 등 10년간 재직하며 2100여명의 독립군 간부 양성에 매진했고,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군사훈련교본이라 할 수 있는 '보병조전'(步兵操典)을 편찬했다.

    윤 선생은 1919년 3·1운동 직후인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됐고 1924년 2월에는 오늘날의 국회의장이라 할 수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1927년 개헌안 기초위원, 1930년 군사위원회 위원장, 1933년 군무차장을 역임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중책을 맡아 활약했다.

    하지만 윤 선생은 6·25전쟁 때 북한에 납북됐고 1959년에는 북한 정권으로부터 반혁명 분자로 몰려 숙청됐다. 1989년에는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손녀인 미래희망연대 김을동 의원은 뉴시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나라를 빼앗겼을 때 임시정부에서 직책을 맡았던 분들에게는 오로지 나라를 되찾아야겠다는 하나의 목적 밖에 없었다"며 "현재의 정치인들은 일신의 영달을 다 버리고도 겸손했던 독립운동가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조부(김좌진 장군)도 임시정부 산하에서 국방부장관 제의를 받았지만 무인들은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거절하고 군정서에서 총사령관을 지냈다"며 "윤 선생 역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본인이 해내고자 하는 일에 대한 현실적인 벽을 느껴 사임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new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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