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20일 (일)
전체메뉴

[작가칼럼] 2011년 그 바다 그리고 엔젤트럼펫- 최형일(시인·고성중삼산분교 교사)

  • 기사입력 : 2011-01-14 00:00:00
  •   
  • 새해가 열리는 날 고성 영현에 있는 계승사(桂承寺)에 다녀왔다. 올해가 토끼해인지라 계수나무가 잇고 있는 세상을 보기 위함이랄까.

    우리네 민화에 달나라 계수나무 아래 방아 찧는 모습도 있는지라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었다.

    특히나 중생대 백악기로 추측되는 시기에 흐르는 물결이 그대로 화석화되어 남아 있는 모습은 가히 역사의 도도한 자태에 숙연함을 배우게 했다.

    요즘을 흔히 혼돈의 시기라고들 한다. 무던하게 먹고사는 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동안 인류는 양적 삶의 팽창을 도모하다가 컴퓨터와 정보 통신으로 인해 많은 부문에 있어 질적인 세대를 구분 짓고, 사유의 영역을 분점하는 만화적 세대가 공생하는 시대에 접하고 있으니 과거의 가치관으로는 시대를 다 읽을 수 없는 현실이 만들어 놓은 사실이 아니겠는가.

    혼돈(混沌), 장자 내편에 이르기를 혼돈칠규(混沌七竅)란 말이 있다.

    머리에 눈코입귀가 없는 혼돈에게 북해 천제 홀(忽)과 남해 왕 숙(熟)이 매일같이 구멍을 뚫어 주었는데 구멍이 열리는 일곱째 날 혼돈은 죽었다는 신화다.

    즉 인간의 순수한 가치가 세상의 분별심으로 인하여 속세의 질서에 길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혼돈을 무질서라 말하지만 장자의 우화는 억지로 구멍을 뚫어 세상 유혹의 맛을 길들이는 것이 비록 순수성을 잃게 하는 원인은 될지라도 새로운 진화를 위한 몸부림이란 것이며, 비슷하겠으나 기독교에서도 일곱째 되는 날 인간의 원죄를 회개하는 날로 정하지 않았겠는가.

    우주 이전의 상태 즉 카오스의 세계가 바다로부터 시작돼(탈레스적 신화론) 그 세계가 볼 수도 만질 수도 가늠하지도 못한 것들이었다가 어둠과 밝음, 음과 양의 질서로 새롭게 되는 일곱째 되는 날 코스모스(질서)가 바로 서는 일이라 할 수 있기에 지금의 어수선함을 꼭 비관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날을 터 잡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거실에 노란 엔젤트럼펫이 은은한 향으로 저녁을 맞는 새날에 프란시스코 고야의 판화집을 뒤척이다 ‘이성의 잠’이란 것을 본다.

    검은 박쥐들이 에워싼 탁자에 엎드려 잠을 자는 이성이 그려져 있고 “잠든 이성은 괴물을 낳는다”란 작가의 메모가 있다.

    새로운 질서가 열리는 시기에 집단 이성의 잠은 통제 불가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경고가 아닐까 싶어 마시던 찻잔을 멈췄다.

    이성이란 무엇인가. 사물을 판단하는 힘이다.

    참됨과 거짓, 선과 악을 식별하는 능력을 의미하지 않던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세상이 혼돈하는 시대 즉 현실적으로 통제 가능한 이성인 에고 혹은 슈퍼에고(초자아: superego)가 가상현실을 통해 이드(id)화되는 세상 그것이 제대로 분별되지 못한 영혼들에 의해 벌어지는 사건 사고가 우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괴물이 아닐까 싶다.

    백악기에 멈춰선 물결 화석을 쓰다듬던 손을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털자 세월의 비듬이 새처럼 날아오르며 하이얀 햇살로 난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새로운 질서는 열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전제한 새로운 이성이란 사회적 조직이 일정하게 켜를 지으면서 짜인 무늬 혹은 물결이 아닐까 싶다.

    어느 시대나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음과 양의 기운이 공존하며 그 전후를 여는 것은 분명 하늘(조화로운 이성 super ego)의 천사가 부는 나팔소리란 상상을 해 본다. 이렇게 노란 엔젤트럼펫이 핀 거실에서.

    최형일(시인·고성중삼산분교 교사)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