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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 경남도 무형문화재 제34호 영제시조 이수자 이종록 선생

“영남이 뿌리인 영제시조 옛 명성 되찾는 게 꿈”

  • 기사입력 : 2011-02-0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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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제시조 이수자 이종록 선생이 의령군민사회복지관에서 열리고 있는 시조 수업에서 시조 한 대목을 소개하고 있다.

    험준한 산등성이를 질주하는 덩치 큰 동물의 거친 호흡이 머릿속을 울린다. 한 호흡 쉬었다 싶더니 한 무더기 물이 천길 낭떠러지로 향한다.

    가슴속에 깊이를 모를 소(沼)가 퍼렇게 패었다.

    온몸이 쿵쾅거리는 흥분에 휩싸일쯤 매가 하늘을 느리게 선회하는 여유가 찾아온다, 그러다 이내 산등성이를 내달렸다가, 또 천길 폭포수가 된다. 이렇게 오르내리기를 몇 차례, 어느새 몸과 마음이 멈춰선 바람처럼 평온하고 맑아지는 느낌이다.

    전율(戰慄).

    채 몇 분도 안돼 가슴을 찌릿하게 만들 수 있는 게 세상에 얼마나 될까.

    영제시조(嶺制時調) 예능 보유자 이종록(68) 선생의 시조창을 접하는 순간, 목소리의 울림에 따라 오르내리는 스스로에 깜짝 놀랐다.

    석회처럼 굳어 좀체 열리지 않던 가슴이었는데. 정말 잠깐 사이에 오랫동안 잊었던 흥(興)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의령에서 만난 이종록 선생이 들려준 창(唱)은 심금을 울리는 묘한 매력이 넘쳤다.

    이 선생은 “영제시조가 본래 그래. 액센트가 강하고 씩씩하며 웅장한 느낌을 주지. 또 뚝뚝 끊어지게 불러 경상도 특유의 색채가 강하게 나타나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몰입되도록 하는 맛이 있는 게 특징이야”라고 말했다.

    이어 “한편으론 점잖고 격조가 높아 궁중에서도 숭상했고, 음악성을 인정받아 전국 각지의 시조인들 사이에 널리 애창됐지”라고 설명했다.

    이종록 선생은 영제시조 예능보유자다. 동시에 일생을 영제시조를 보존하고 전수하는 데 열정을 쏟고 있다.

    이 선생과 영제시조와의 만남은 숙명이었다.

    이 선생은 의령군 부림면 경산리에서 출생했다. 부림면은 조선시대 영제시조 3대 명창 중 한 사람인 손덕겸(1849∼1916)의 고향이기도 하다.

    당연히 동네 서원(낙산서원)에서 어른들이 즐겨 부르던 시조창을 듣고, 흉내를 내며 자랐다.

    이 선생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따라 해본 게야. 그런데 어린 마음에 뭔가 당기는 게 있었던 모양이야. 뭔가 출렁거리는 소리가 참 좋았던 것 같아.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귀를 쫑긋쫑긋 세운 탓에 두서너 곡은 외울 수 있었다”며 “가끔 읊조리면 어른들에게 ‘참 잘한다’는 칭찬을 듣곤 해 제대로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은 있었는데 그게 지금으로 이어질 줄을 몰랐지”라고 옛 기억을 더듬었다.

    어릴 적 이후로 영제시조는 이 선생의 머릿속에 차츰 잊혀져 간다.

    이 선생은 진주사범대학을 졸업하고 62년부터 교사생활을 시작, 10년간은 평범하게 지냈다.

    혼자 있을 때면 가끔 어릴 적에 들었던 가물가물한 곡조를 흥얼거렸을 뿐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했다.

    어느 날 새벽. 한 라디오에서 시조창이 흘러나왔다. 하루 이틀 듣는 사이 가슴속 깊이 감춰져 있던 시조에 대한 욕구가 서서히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이 선생은 “아무리 피곤해도 매일 5시쯤 일어나 들었지. 그런데 어째 흥이 나지 않았어. 어릴 적에 듣고 따라하던 그런 맛이 없었지.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 영제시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나 봐”라고 말했다.

    하지만 라디오 프로그램은 이 선생이 창을 배워보자는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됐다. 근무지였던 부산은 물론이고, 서울로 또 광주·전주로 이름난 명창이 있는 곳이라면 불원천리하고 달려갔다. 시조에 대한 갈증이 심했던 탓도 있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잘하고 싶은 욕심에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컸다.

    10년을 쫓아다니다 보니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98년 대한시조협회 본부대회 대상부 1위를 차지하며 실력을 확인했고, 이듬해 전주대사습 시조부문 장원에 오르면서 명창의 반열에 합류하게 된다.

    아뿔싸.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을 이때쯤 깨우쳤다.

    이 선생은 “대회에 입상하고 나서 광주지역 시조 무형문화재인 이상술 선생이 ‘영제시조를 찾아 영제시조를 한번 해봐라’고 했던 말이 생각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자신의 고향인 의령이 뿌리이기도 한 영제시조를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의 시조를 다 해봤지만 어릴 적 귀에 익었던 느낌과는 동떨어진 것을 스스로도 깨우쳤기 때문이다.

    일단 스승부터 찾기로 했지만, ‘영제시조’ 용어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방학을 이용해 안동과 의성 등 경북지역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영제시조는 흔적조차 찾기가 어려웠다.

    낙담을 거듭하던 던 중 ‘영제시조’가 지난 90년 대구시 무형문화재(제6호)로 등록된 것을 알았다.

    물어물어 영제시조의 맥을 잇고 있던 이기능에게 시조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기능은 경북 성주 출신으로 친구였던 김영도로부터 시조를 전수받았는데, 김영도는 손덕겸에게 영제시조를 배웠다. 때문에 이기능은 손덕겸 선생의 맥을 이은 영제시조의 정통 계보라고 할 수 있다.

    이기능은 당시 서울에 머물며 가끔 대구전수관에 들러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이종록 선생도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 선생은 이후 이기능 문하인 영제시조 보유자 박선애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오랫동안 갈망했던 터라 아쉬운 대로 해갈은 됐지만, 어릴 적 기억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았다.

    이종록 선생은 “어딘가 늘 한구석이 허전했다. 사용하는 언어 때문이지. 대구지역과 경남지역의 말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며 “이를 통해 우리 지역에 들어맞는 영제시조를 제대로 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선생의 영제시조 전파는 지난 2005년 퇴직을 하고 본격화된다. 시조를 배우느라 평교사로 교직을 마쳤지만 후회 없는 퇴직이었다고 말한다.

    부산 구포에 개인전수관을 차리고 열심히 공연을 다녔다. 공연 때마다 영제시조를 알리는 소책자를 한묶음씩 가져가 관객들에게 나눠줬다.

    의령군민사회복지관, 마산가곡전수관, 부산지역 3군데, 울산 등 영제시조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무엇보다 알리는 것이 급하고, 또 가만히 앉아 제발로 찾아오기만을 기다려서도 안 되고 배우는 사람들에게 먼길을 찾아오는 수고를 끼쳐서도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 자신이 배우러 다닐 때의 고생을 알고 있기에 가능한 배려였다.

    이 선생은 1주일에 1700리를 다닌다.

    돈이 생기는 일도 아닌데 사재를 털고, 귀찮은 기색도 없이 부지런을 떤다.

    이 선생은 “수강생한테 돈을 받아 본 적이 없어. 요즘 세상에 배우러 오는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다”며 “혹 알아. 소질 있는 제자가 나타나 맥을 잇게 될는지”라며 활짝 웃었다.

    이종록 선생이 밤잠을 설치며 좇는 꿈은 딱 하나다. 제자를 양성하고 많은 사람에게 시조를 알려 ‘영제시조’의 옛 명성을 되찾는 것이다.

    의령을 본거지로, 창원지역에도 전수관을 마련해 후계자 양성에 본격 나설 계획이다.

    지난해 경남도 무형문화재 제34호 영제시조 이수자로 지정받은 것도 선생의 결심에 큰 힘이 됐다.

    이 선생은 “영제시조는 단순한 재능 이전에 스스로의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는 수양의 의미가 있어. 한 소절만 할라치면 높은 벼랑에서 먼지를 날려버릴 듯 온갖 번뇌가 훨훨 사라져 버리지”라며 “많은 사람들이 시조를 통해 갈등과 억눌림에서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선생은 요즘 일주일에 한두 번 의령에 들른다. 짬이 나면 가끔 읍에서 40리 떨어져 있는 그의 고향마을을 찾곤 한다.

    선산이며 길, 논밭도 옛 모습이다. 마을 한편에 있는 서원(書院)도 그대로다.

    갑자기 한 꼬마가 서원 주위를 맴돌다 산과 들을 내달린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낯설지가 않다.

    유난히 반짝거리는 눈망울의 꼬마는 귀에 익은 시조 한 수를 흥얼거린다. 소리가 절로 흥을 돋우는 게 참 좋다. 내 힘이 다하는 순간까지, 녀석의 흥겨운 소리를 지키고 전하리.

    이종록 선생이 영제시조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영제시조(嶺制時調)란= 시조창으로 전통 성악고의 한 갈래로 시절가, 시절단가라고도 한다. 고려 말부터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최고 문헌은 석북 신광수(1712∼1775)의 ‘석북집’, ‘개서악부’로 가객 이세춘이 시조에 장단을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시조창은 조선 후기에 비로소 시작됐으며 현재의 평시조처럼 황종, 중려, 임종의 3음부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여러 가곡의 영향을 받아 많은 시조 곡조가 파생됐고, 시조창이 각 지방으로 널리 보급됨에 따라 그 지방의 기호에 맞는 지방적 특징이 발생하게 됐다. 서울 지방을 중심으로 한 경제,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한 완제(完制), 경상도의 영제(嶺制), 충청지방의 내포제(內浦制)가 그것이다.

    영제는 경상도 지방의 말씨를 닮아 액센트가 강하고 씩씩하며 웅장한 느낌을 준다. 영제시조는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어 ‘영판 좋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음악성이 인정돼 있으며 전국 각지에서 시조인들 사이에 널리 애창되던 시조이다. 또한 점잖고 격조가 높아 궁중에서도 숭상한 시조창이다.

    영제시조 명창으로는 경주 출신의 최창노가 알려져 있으며, 고종 때 3대 명창으로는 군위 고영태, 경주 이명서, 의령의 손덕겸이었다.

    오늘날 영제시조는 이기능과 채숙자에 의해 명맥이 계승됐고 현재는 이기능의 문하인 박선애가 영제시조 보유자가 됐다.

    현재 영제시조는 전국적으로 퍼진 호남지역의 시조에 비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글=이문재기자 mjlee@knnews.co.kr

    사진=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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